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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 서정자들은 1894년 9월 27일(음력 8월 28일) 동학농민군과 민보군이 처음으로 커다란 전투를 벌였던 역사의 현장이다.
서울에 무단 침입한 일본군 제5사단 소속 혼성 제9여단이 7월 23일 경복궁을 기습 점령해서 나라가 위태롭게 되자 경상도 북서부의 동학농민군은 항일 무장봉기를 준비하였다. 일본군 후속부대가 청국과 싸우기 위해 서울로 직행하는 선산 해평. 상주 낙동. 상주 태봉. 문경 진안 등지에 병참부와 전신선을 설치하자 동학농민군은 병참부를 위협하고 대구와 문경 사이 전신선을 끊어 통신망을 단절시켰다.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후방에서 공격받은 유일한 사건이었다. 예천 동학농민군 지도자 관동수접주 최맹순(崔孟淳, 1852-1894)은 거점인 소야(현 문경시 산북면 소야리)를 중심으로 일본군 병참부 공격을 계획하였다. 이를 위해 여러 마을을 다니며 군수미와 군수전을 강제로 걷자 읍내에서 결성한 민보군이 이를 금지하였고, 9월 9일 감천 귀밑(현 예천읍 갈구리)에서 붙잡은 11명을 한천 모래밭에 생매장하였다. 분노한 동학농민군은 읍내로 드나드는 사방 길목을 막으면서 화지마을과 금당실에 대규모로 집결하여 민보군을 압박하였다. 예천 용궁 상주 함창 문경 안동 풍기 영주 단양 청풍 등지의 접주 13명이 화지에 모였고, 상주 산양(현 문경시 소재)에도 용궁 읍내를 점거하기 위한 동학농민군이 집결하였다. 산양 집결지에는 일본군 태봉 병참부에서 보낸 정탐병 중 다케노우치 모리마사(竹內盛雅) 대위가 발각되어 자결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는 갑오년 당시 동학농민군과 일본군이 부딪친 첫 번째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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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자들 전투는 9월 27일 읍내로 진군해서 한천 남쪽 유정에 진을 친 화지 농민군이 저녁 무렵 한천 제방과 현산의 민보군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빗발치는 총소리와 총알의 섬광 속에서 어두워질 때까지 계속된 전투는 남쪽 동산에 횃불이 오르며 "안동 구원병 삼천이 온다."는 소리가 들리자 갑자기 종료되었다. 기세가 꺾인 화지농민군은 사방으로 밀려났다. 금당실 농민군도 뒤늦게 광천(현 예천읍 생천리)쪽으로 공격했으나 패산하고 말았다. 충주에 있던 일본군이 다음날 오전 9시경 석문리(현 문경 산북면 이곡리)를 지키던 소야 농민군을 기습하였고, 이어 소야로 진입하여 건물 11칸에 보관해 둔 각종 무기와 군수전 등을 모두 탈취해갔다. 일본군 증원군과 안동 민보군 그리고 경상감영병도 잇달아 예천에 들어왔다. 관동수접주 최맹순, 접사 장복극, 용궁의 고상무 3형제 등은 체포되어 즉시 처형되었고, 금당실의 전기항, 고산의 윤치문, 퇴치의 박현성, 직곡의 박학래 등 가지로 흩어진 동학농민군 참여자는 오랫동안 추적당하며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오호, 슬프나 자랑스럽다! 예천의 동학농민군은 이 땅을 침략한 일본을 물리치고자 봉기하였으나 민보군과 일본군에게 밀려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여기 두루 뜻을 모아 서정자들 가운데 빗돌을 세워 척왜(斥倭)와 안민(安民)의 대으를 기리고, 서정자들 전투를 기억하고자 한다.
2023년 10월 12일(음력 8월 28일) 예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