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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무섬마을 / 국가민속문화재 제278호 무섬마을은 마을의 삼면을 내성천이 감싸듯 휘감아 돌아나가서 육지 속의 섬처럼 보이는 물돌이 마을이다. 풍수로 보면 매화꽃이 떨어진 모습을 닮은 매화낙지 또는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연화부수 모양의 지형으로서, 명성과 덕망이 높은 자손이 많이 나온다는 명당으로 꼽히는 곳이다. 마을 이름인 무섬은 물 위에 떠 있는 섬을 뜻하는 수도리의 우리말이며, 원래 물섬이라고 불리었다. 이 마을은 조선 시대인 17세기에 박수가 병자호란 후 출사를 단념하고 충절과 은둔군자의 선비정신으로 만죽재를 건축하여 입향 후, 박수의 증손녀와 혼인한 김대가 들어와 살면서 만들어진 마을로, 반남 박씨 가문과 선성 김씨 가문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조선 시대에는 수많은 선비와 관리를 배출하고 부자가 많이 살았던 마을이었고, 대한제국 시기에도 120여 가구에 500명 이상이 살았을 만큼 마을이 번성하였다. 일제 강점기인 1934년에 큰 홍수로 마을이 절반 정도가 사라지는 시련을 겪었지만, 해방 전까지는 100여 가구가 사는 큰 마을이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많은 주민이 도시로 떠나가면서 한때 마을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였으나 이후 명맥을 이어오다가 2000년대에 전통 마을로 지정되고 정비가 이루어지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현재는 약 50가구에 5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40여 동의 전통 가옥이 있다. 무섬마을은 자연과 어우러진 전통 마을의 모습을 잘 간직한 곳으로,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다양한 구조와 크기의 전통 가옥이 많이 남아 있다. 흥선대원군의 친필 현판이 있는 해우당(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92호), 조선 현종 7년(1666)에 박수가 지은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인 만죽재(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93호) 등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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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섬마을은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마을과 외부를 이어주는 외나무다리가 폭이 좁아서 긴 장대에 의지하여 건넜다. 과거에는 장마 때마다 다리가 물에 떠내려가서 매년 새로 외나무다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상은 자유로웠던 마을이다. 조선 시대에는 양반과 농민이 함께 공부하였고, 일제 강점기에는 항일 운동의 본거지로 양반과 상민, 남녀노소의 구별 없이 민족교육을 실시했던 아도서숙(亞島書塾)이 있었다. 6.25전쟁 때에는 좌익과 우익이 공존한 마을이었다. 면적 대비 전국에서 가장 많은 항일 독립 운동가를 배출한 마을로도 유명한데 독립 유공자만 5명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