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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2025년 10월 Special Theme 광복 제80주년 기념 특집 ‘을미사변(일본의 명성황후 시해)을 다시 본다’ 면회하지 않았고, 을미사변의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호텔의 방안에 틀어박혔다. 사실 사바찐은 명성황후의 암살 과정을 목격했다. 명성황후 암살자를 둘러싸고 의견이 분분했다. 그럼 에도 사바찐은 명성황후 암살의 책임자 규명 보다는 다급한 자신의 신변 안전이 우선이었다. 사람은 진실을 추구하다 두 발짝 앞으로 나가서는 한 발짝 물러난다. 고민과 과거와 삶의 권태가 그들 을 뒤로 물러나게 한다. 그러나 진실에의 열망과 굽 히지 않는 의지가 조금씩 앞으로 민다. 사바찐은 을 미사변에 관한 진실을 그대로 묻을 수는 없다는 최 소한의 양심으로 보고서를 작성했다. 을미사변의 목격자 사바찐은 조선인과 일본인의 암살 위협에 시달렸고, 주한 러시아공사관의 보호마 저도 받을 수 없었다. 주한 러시아공사관은 사바찐 의 증언을 기초로 일본의 책임론을 부각시켜 조선에 서 외교적 영향력을 강화하려고 노력했다. 주한 일 본공사관과 김홍집내각은 을미사변의 진실을 은폐 하기 위해서 사바찐을 회유하려고 시도했다. 을 미사 변의 진실을 둘러싼 각각의 이해관계가 첨예해지자 사바찐은 자신의 중립적인 태도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었다. 사바찐은 조선을 둘러싼 복잡한 열강의 외교관계에서 한 인간의 생존 방법이 무엇일까를 고 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쪽에 기울어진 선택이 단 기간에는 도움이 되지만 장기적으로 어려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5시 45분. 명성황후 시해 현장 새벽 5시 45분 사복을 입고 도검으로 무장한 일본 자객 5~6명이 고종과 왕비의 처소에 돌진하는 순간, 궁내부대신 및 일부 시위대 소속 장교가 고종을 보 호하려고 시도했다. 일본자객이 곤녕합 방에 침입하자 궁내부대신 이 경직(李耕稙)은 곤녕합의 방으로 뛰어갔다. 당시 곤 건청궁 내 복원된 곤녕합(왕비 거주 공간) 전 경(위)과 복원돼 내걸린 고종의 친필 ‘곤녕합’ 현판(국가유산청 제공) 복원된 옥호루(위)와 당시 옥호루의 모습(국가 유산청 제공)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 낭인 토오 가츠아키[藤勝顯]가 사용한 칼(히젠도). 이 칼의 칼집에는 ‘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 刺老狐, 순식간에 늙은 여우를 단칼에 찔렀 다)’라는 내용이 쓰여있다(문화재제자리찾기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