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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2023년 12월 Special Theme   카이로선언 80주년 특집 해외 독립운동과 한국독립운동가들의 활약 “ …전기(前記) 3대국(미국 · 중 국 · 영국 : 인용 자)은 한국민의 노예 상태에 유 의하여 적절한 절차를 거쳐서 (원문은 ‘in due course ’로 ‘적당 한 시기에’로도 번역됨 : 밑줄은 필자) 한국이 자유 독립하게 하기로 결정한다” 「카이로선언」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연합국 이 한국의 독립을 최초로 명시해서 보장한 국제협약 이었다. 연합국이 특정 국가를 지칭하여 독립을 보 증한 나라는 한국뿐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컸고, 임시정부 전시외교의 가장 커다란 성과였다. 그러나 ‘in due course’는 시간상으로 독립을 유보하고, 과 정상으로 ‘모종의 절차’를 거친 뒤에야 독립이 달성 되는 사실을 뜻했으며, ‘모종의 절차’는 루즈벨트가 구상하던 신탁통치를 가리켰다. 임시정부는 총력외 교를 펼치면서 신탁통치안을 거부하였으나 목표를 관철시키지 못했다. 「 카이로선언 」 은 한국독립을 보 증하면서도, 신탁통치안을 전후 대한정책의 방침으 로 국제사회에 공표하였다. 샌프란시스코 회의, 필사의 참가 노력이 좌절되다 연합국의 승리가 다가오는 제2차 세계대전의 막 바지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국제연합(UN)을 결 성하기 위한 국제회의가 열렸다. 미 · 영 · 소 · 중이 주최 국이었던 샌프란시스코 회의(1945. 4. 25~6. 26)는 연합국 50개국이 참가하여, 전후 처리와 국제평화 문제를 토의한 제2차 세계대전 중 최대 회의였다. 임 시정부는 이 회의를 한국독립과 신탁통치안 등 한국 민의 목소리를 직접 전달할 수 있는 최후의 기회로 판단했다. 샌프란시스코 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접한 조 소앙은, 1945년 2월 23일 임시정부 외무부장의 자 격으로 충칭의 미국대사관을 방문하여 샌프란시스 코 회의에 한국 대표들을 파견하도록 협조해주기를 요청했다. 2월 말 임시정부 외무부는 미 · 영 · 소 · 중 4 개국에도 한국 대표의 참가 신청 공문을 1차로 발송 하였다. 나아가 임시정부는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참 가권을 획득하기 위해, 2월 28일 「 대덕(對德 : 대독 일)선전포고 」 를 결의 · 발포하였다. 이 날 조소앙은 샌 프란시스코 회의에 임시정부가 참여하고 싶다는 성 명도 발표했다. 그는 3월 13일에도 충칭 주재 각국 카이로선언 원문(국가보훈부 제공) 2015년 12월 1일 이집트 수도 카이로 외곽의 메나하우스호텔 정원에 서 열린 카이로선언 기념비 제막식(연합뉴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