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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발단의 중심
1918년 여운형은 상하이에서 서병호, 조동호, 장덕수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였고 김규식을 초청하여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했다. 김규식의 독립청원운동을 지원하기 위하셔 그는 장덕수를 일본에 보내 일본 유학생들에게 김규식의 파리강화희의 참석을 알리게 하고, 기타 신한청년당 당원들은 국내 각처로 보내 이 사실을 구내 요로에 알리도록 했다. 그 무렵 북경에 있던 이광수는 이 소식을 가지고 동경에 돌아가 2.8독립선언을 기초하기로 했다.
그리고 양양 자신은 중국 길림성으로 가서 활동하여 무오독립선언의 촉매 역할을 했다. 간도에 있는 독립운동가 김약연, 정재면등과 만나 파리강화회의와 민족자결주의원칙등 상황을 설명하였고, 연해주에 가서는 그곳에 체류하고 있는 박은식, 이동녕, 조완구등을 만나 이 사실을 알렸다. 당시 여운형이 연해주에 가서 한 달가량 머물렀던 것은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기 위한 것이었다.
이처럼 조선대표가 파리강화희의에 가서 독립을 청원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만주,연해주에 있던 교포들, 일본에 있던 유학생등, 그리고 국내 지도층에 알려지면서 거족적인 3.1운동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3.1운동의 막후 지도자는 모양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점은 역으로 그해 말 일본정주가 그를 동경에 초청했던 일로써 간접 증명된다. 3.1운동후 몽양의 측근이었던 장덕수를 체포한 총독부 경찰은 장덕수를 통해 3.1운동의 배후가 몽양이었다는 사실을 정확히 파악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조선은 많은 지도자가 있었지만 일본 정부가 당년 34세의 젊은이에 지나지 않았던 몽양을 동경에 불러들인 까닭이 바로 거기 있었다. 그들은 3.1운동의 막후 연출자인 몽양을 회유하여 독립운동보다는 자치운동을 권유할 생각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