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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실 향 민 의 삶 다고 해서 “참새”라는 별명이 붙었다. “울뚝이”는 영흥 출신 별 명인데, 사전적 의미로는 성미가 급해 참지 못하고 말이나 행동 을 우악스럽게 하는 사람을 말한다. 단천은 “칡구리”라는 별명 이 붙었는데, 그 뜻을 알 수 없다. 당시 실향민 출신들이 워낙 많다보니 자연스럽게 출신 고향별로 학생들이 친하게 어울리는 문화가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본적지인 고향주소가 실린 주소록은 1964년 제10회 졸업앨 범까지도 확인되는데, 이 무렵에는 학생 중 3,4명만이 월남하 기 전의 고향주소가 적혀 있을 뿐이다. 고향별 친구 사진 찍기 는 점차 희석되었지만, 그래도 1969년에 졸업한 제15회까지는 출신 도별로 사진을 찍었다. 이때는 강원도 출신으로 사진을 찍 은 학생은 다수이며, 월남 실향민 출신으로는 함남 14명, 함북 8명, 평남 3명, 황해도 3명이다. 이남의 타지역에서 속초로 이 전한 이주민 학생도 상당수 늘어났다. 졸업앨범에 기록된 본적지와 같은 고향끼리 찍은 졸업앨범 사 진은 당시 실향민이 집단으로 정착한 속초의 실상을 여실히 보 여 주고 있다. 1953년 휴전협정으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막혀 버렸지만, 여전히 속초는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임시로 머무는 곳’이라는 실향민의 의식이 학교졸업앨범에 반영된 것 이다. 수복 직후 속초는 거주지보다 본적지 고향이 더 중요했 다. 그러다가 1960년대 중반에 들어서야 지역사회에서 출신 고 향이 더 이상 큰 사회적 의미를 지니지 않게 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