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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隱先生墓碑銘(송은선생 묘비명) 국역
출처 : 밀성박씨 졸당공파보 기사보 1권151페이지
지금 임금 헌종 3년 가을에 내가 지밀주사로 되었고, 주 남쪽에 고예부시랑 송은 박선생의 사당이 있었다. 선생은 곧 전조 두문동 여러 현인중에 한분인데, 매양 그의 기상과 지절을 상상해 보았으나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그의 진영을 우러러 보니 긴 수염과 신장이 열자인 것은 포은 정선생의 시와 같고 범의 눈썹 봉의 눈은 야은 길선생의 시와 같았다. 불그레한 얼굴과 반백 머리에 정신이 살아있는 듯하였다. 바라보면 엄숙하고 곁에 가면 온화하여 사람에게 창송 고죽의 느낌과 고산원수의 뜻이 있게 하였다. 대저 칠분 단청으로 그린 화상이 상전이 벽해로 되는 아득한 세월을 겪은 나머지에도 생생하고 늠늠하였다. 천년을 지냈건만 보는 사람은 옷깃을 여미고 머리털이 꼿꼿해지게 됨을 깨닫지 못하였다. 하물며 그의 평생 행적과 조정에 있을 때의 대개가 옥이 빛나고 구슬이 아름답듯 점점 나타나서 먼지도다. 비치는 해와 별같고 우주에 뻗힌 동량 같은 즉 또 이 사문의 후한 다행이 아니겠는가. 삼가 상고하니 선생의 휘는 익인데 처음 휘는 천익이고 자는 태시이다. 성은 박시로서 신라 밀성대군의 후손이다. 휘는 언부이고 고려때 시중이며 밀성군으로 봉호된 분이 있어 이분이 휘 효신을 낳았는데 중조의 문하시중 벼슬을 했고 시호는 문익이다. 이가 대장군 후 공필를 낳았고 이가 이부상서 휘 육경을 낳았다. 이가 이부상서 휘 대화를 낳았고 이분이 이상 휘 간을 낳았는데 선생의 왕고이다. 고의 휘는 영균 삼재였고 은산부원군으로 봉군되었으며 시호는 문헌이다. 비는 능성구씨인데 좌정승 문정공 위의 따님이다. 충숙왕 임신년 7월 27일 밀성삽포리에서 선생을 낳았는데 기도가 거룩하고 문장이 뛰어났다. 공민왕때 과거에 올랐고 소감을 거처서 한원에 여러번 천거되었으며 예부시랑과 중서령으로 옮겼다. 지극한 성품이 있어 효하면서 우애하고 사랑하면서 공경하였다. 몸을 닦으면서 뜻을 세우는데에 잠이 있었고 남을 가르치면서 몸을 가지는데에 법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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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왕실을 도와서 전벌하면 문득 공을 아뢰니 사람들이 장상의 재주를 겸전했음을 알렸다. 포은 야은과 도의 사귐을 했고 성리를 강론해서 멀리 하도낙서도 소구하였다. 야은이 선생의 화상에 찬하면서 「강상을 붙들어서 천재에 우뚝하다. 덕스러운 얼굴이고 이학의 으뜸이다.」 하였다. 고려국 운수가 끝나게 되자 선생은 아우 밀성군 천경과 더불어 기미를 보고 용감하게 물러 났다. 벼슬을 버리고 남쪽 시골로 돌아와서 스스로 송은이라 호했다. 휫파람 불고 시 읊퍼서 스스로 즐거워 하였다. 포은이 한가한 날에는 가끔 찾아와서 시국을 상심하며 심사를 얘기하였다. 또 이동은 재홍 홍만은 재이목은 색 이휴은 석주 김성은 대윤과 더불어 충의로 서로 사귐을 맺였는데 세상에서 팔은이라 일컬었다. 당시 여러 현인이 시를 지어 준 것이 여러편 이어서 혹은 「백세 종사에 염락과 추로라」 했고, 혹은 「충성된 혼은 솔의 절개이고 의로운 넋은 대의 마음이다.」 했으며, 혹은 「명절은 백이 숙제와 같고 심사는 기산 영수에 맑다.」 하였다. 황보공이 신도비문을 지었고 변춘정이 시장을 꾸몄으며 김삼족당이 유사를 써서 이미 다 말한 다음이니 다시 군말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대개 그가 먼저 율리의 송국을 읊프고 홀로 서산에 고비를 캤는데 어진 자손이 대마다 그 아름다움을 이룩하였다. 도덕과 절의로 착함을 쌓아 경사가 포개지니 하늘이 선생에게 보담함이 또한 훌륭하였다. 홍무 갑술년에 공조판서로 불렸고 또 형조·예조·이조·이조의 판서로 불렸으며, 병자년에는 좌상으로 불렀으나 모두 일어나지 않았다. 두견시를 읊프면서 회포를 불렀는데 「높고 넓은 하늘 땅 길 잃은 사람 달지고 꽃도지고 적막한 생각」하는 글귀는 천고 지사의 옷깃을 눈물로 적시도록 하기에 족하다. 무인년 11월 27일 송계리 기산 아래에서 고종하였다. 전날밤에 목욕하고 손톱을 깍은 다음 자리를 정돈하고 옷을 갈아 입었다. 네아들을 불러서 유서를 주며 「나는 왕씨의 혼령에게로 돌아 가거니와 너희들은 이씨의 세상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