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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사○ 해동사는 민족정기의 표상이요, 호국충절의 사표이신 안중근(安重根) 의사를 배향하는 사우다.
○ 안 의사의 본관은 순흥이요, 문성공 안향의 26대 손으로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성균관 진사 태훈(泰勳)의 아들로 태어났다.
○ 초명은 응칠(應七), 가슴과 배에 7개의 점이 있어 북두칠성에 응했나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어려서 한학을 배우고 7세에 무예를 익혔으며 1894년(16세) 김아려와 결혼하고 1904년 상해로 건너가 프랑스 신부로부터 교육을 통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여야 한다는 충고를 듣고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됨에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귀국하여 삼흥학교를 설립하고 남포의 돈의학교를 인수하여 교육에 힘썼다.
○ 1907년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이 되어 반일운동을 행동화하고 이해 북간도를 거쳐 블라디보스톡에 도착, 한인청년회에서 활약하였다.
○ 1909년 대한의군을 조직, 참모총찾 겸 독립대장을 맡아 3백명의 의군으로 두만강 경흥 등지에서 일본군과 격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퇴패, 이해 결사동지 12명과 단지회를 결성 결사보국 할 것을 맹세하고 마침내 10월 26일 우덕순과 함께 하얼빈 역두에서 침략의 원흉 이등박문을 저격하고 의연히 체포되어 여순감옥에 수감되었다. 옥중에서 자서전과 동양평화론을 집필, 이등박문의 15가지 죄목을 들어 일본의 야만성을 규탄하다.
○ 1910년 3월 26일 조국독립의 한을 품고 교수형으로 순국하다. (향년 32년)
○ 안 의사의 유물 2백 여 점 가운데 20여 점이 보물 596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 一日 不讀書 口中生荆棘(일일 부독서 구중생형극) -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서 가시가 돋아남
○ 黃金百萬兩不如一敎子(황금백만냥불여일교자) - 황금백만냥도 자식 하나 가르침만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