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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현 선생은 1852년 철종 3년 임자에 영양 상청리에서 태어난 유학자이다. 자는 명옥이고 호는 벽산이다. 구한말에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의병을 일으켜 항전한 의병장이었으며 영흥학교를 세워 구국교육에 헌신한 선각자로 이름을 떨쳤다. 1910년 나라가 망한 뒤에는 일본 식민지 백성으로 살기를 거부하고 동해바다에 가서 도해 순국한 우국지사이다. 삶의 값과 죽음의 뜻을 유덕으로 남긴 겨레의 스승이다. 1895년 을미사변을 당하자 영양향교에서 조승기와 함께 의병을 일으킨 후 청량산으로 나아가 의병진을 설치하고 그곳, 이만도의 선성의병진과 함께 항전하였다. 이어 안동으로 진군하여 김도화의 의병진과 연합하여 상주 태봉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다음에는 의병을 이끌고 강릉으로 북상하였다. 그 곳 민용호의 관동창의군과 동맹하여 대관령 보현산성과 삼척 갈야산성에서 혈전에 혈전을 거듭하면서 피어린 의병전쟁사를 찬란하게 빛냈다. 그때 쌓은 검각산성은 일부나마 상청리에 남아서 의병전쟁을 증언하고 있다. 1905년 을사조약과 1907년 정미조약 때는 광무황제의 밀지를 받고 다시 의병을 일으켰으나 그 때마다 감금되어 옥고를 치렀다. 1908년에는 계몽운동으로 方略을 바꾸어 영흥학교를 설립하니 이것이 영양초등학교의 전신이다. 어느 길도 나라의 운명을 돌리기에는 힘이 모자랐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두문불출하고 아버지 시탕에만 몰두하다가 1914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장례를 마치고 선생도 최후의 자리를 찾았다. 그것이 나라와 어버이를 잃은 선비의 도리요 의리로 믿었다. 상청에서 백리길 대진 앞바다에 가서 11월 7일 장엄하게 도해 순국한 것이다. 사람이 사는 일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이 죽는 일인데 선생은 죽음의 절의를 실천으로 보여 주었다. 자신의 시신조차도 오욕스런 식민지에 묻히기를 거부한 철인의 모습이었다. 나라에서도 선생의 공적으로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