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密城齋記. 齊在密陽治北 推火山下 新羅王子 密城大君而作也 是爲追慕 南距嶺南樓僅 數弓而興大君壇爲相望也 維我朴爲東國大族世所公稱 維我朴爲東國大族世所公稱 而其源則出平新羅始祖王也 新羅末景明王子八大君 曰密城, 曰高陽, 曰達成, 曰竹城, 曰沙伐, 曰完山, 曰江南, 曰月城 也各爲一派 而密城之裔尤稱其繁衍 其後自密城又分爲 異貴者有數十之多 而子孫之盛 彌嶺南蔞全城可謂不億其麗矣 源深遠之理固有如是者 而後孫之所以追慕報本之道 又當如何哉 大君當日退老千菜邑其後衣履之藏傳云 在密州南樓之北而末得其詳豈非一大恨事也哉 新羅紀元千九百七十八年壬戌 夏因暴雨土壤得見臣壙於樓傍 州人及子孫皆謂大君之藏是也 遂封之以完而自後屢回 設壇奉享之議起終有以成之 今嶺南樓北有 曰新羅王子密城大君之壇是也 以每年三月三日 九月九日 虔行祀事 盖天數百年之間 人事盛衰顯晦之疏有如是也 裔孫所感懷者且後如何哉 所謂風流之峴洗陋之亭末和其會在何地 而能不有施顧瞻敎也 今斯齊之起其非晩且遲也哉 窈雄大君之蹟將畿乎 永晦辛旣壇而祀之又且雄字於壇北相望之地 遠挹遺芬徐馨於千百載之下於是乎 不遺基本之義有司言 而子孫之事有司述也 豈非幸者歟 今夫南川江上之雲炳舞鳳山下之草樹果皆昔日之狀 而朝暮四時之觀今古無有異者아(주석;아)登齊眺 望者宜其多曠懷也 始倡其議而董後者秀庸而僅畢正堂不幸作故 來贊踵其事 延及七年 而善竣之其勞皆可紀也 齊之制度其鋸麗爲間凡二十一 棟楹櫰間皆大梴直也 東隅別有一祠 是乃大君子孫 三韓壁控都大將軍諱郁 春享所也 西舍四間扁曰洗陋享 盒用大君當日遨遊堂號也 東舍五間扁曰推火齊 盒用舊太 將軍祠前號也 門又三間 役始癸丑正月工訖 於戊午三月歲月之經爲七年 工費亦屢百萬 而損力優者不可無紀 故別列刻於石而竪之千傍 熙秉 英培二君以藷宗意來貴齊記 於泰坤非所當者 而盡力應俊固裔孫事故敗書之如此云齒 新羅紀元 二千三十六年 戊子 三月 朔日 後孫 泰坤 謹記 출처 : tstory mannam007 한들약초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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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기원 1978년(임술) 봄에 폭우로 인하여 영남루 곁의 땅에 큰 구덩이가 드러났는데, 고을 사람 및 자손들은 모두들 대군의 무덤이 이곳이라 하였다. 그대로 온전하게 봉하고는 이 뒤로부터 여러 차례 단을 설치하여 봉향하자는 논의가 일어났고 마침내 이루어졌으니, 지금 영남루 북쪽에 있는 신라왕자밀성대군지단(新羅王子密城大君之壇)이 이것이다.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에 제사를 경건히 거행한다. 대개 천수백 년 사이에 인사의 성쇠와 현회(顯晦)의 자취가 이러한 점이 있음인지라 후손의 감회야 또한 어떠하겠는가? 이른바 풍류현(風流峴)이나 세루정(洗陋亭)은 어느 곳에 있었는지 모르니, 때때로 돌아보며 탄식함이 없을 수가 없다. 이제 이 재실을 세운 것은 지체하여 늦은 것이 아니겠는가? 가만히 생각건대 대군의 자취는 장차 거의 영원히 묻히려다가 다행히도 단을 만들어 제사하게 되었고, 또한 웅대한 건물을 단의 북쪽 바라보이는 곳에 설치하여, 천년백년 뒤에 멀리 남긴 여운을 짐작하게 하였으니, 이제야 ‘그 근본을 버리지 않는다.’는 의리에 대하여 말할 수 있고, 자손의 할 일도 이어갈 수 있어, 어찌 다행이 아니겠는가! 이제 능파강(凌波江) 위의 구름과 무봉산(舞鳳山) 아래의 초목들이 과연 모두 옛날의 모습이며, 아침저녁과 네 계절의 경치는 고금에 다름이 없을까? 재실에 올라 조망하는 자는 아마도 회포가 많을 것이다. 처음에 그 논의를 주장하여 공사를 감독한 자는 수용(秀庸)인데 정당(正堂)의 공사를 겨우 마치고 불행히도 작고하였고, 내찬(來贊)이 그 일을 이어서 7년이나 끌면서 잘 준공하였으니, 그 노고는 모두 기념할 만하다. 재실의 체제는 매우 거대하고 아름다워 칸수가 모두 21칸이요 기둥과 들보와 서까래가 모두 크고 곧다. 동편에 별도로 사당 하나가 있으니 이는 곧 대군의 자손인 삼한벽공도대장군(三韓壁控都大將軍) 휘 욱(郁)을 봉향하는 곳이다. 서사(西舍)의 서쪽 칸 편액을 세루정(洗陋亭)이라 하였는데, 대개 대군께서 당시에 노닐던 당호이다. 동사(東舍) 다섯 칸은 편액을 추화재(推火齋)라 하였는데 대개 예전의 대장군(大將軍) 사당 이전 호칭을 사용함이다. 문이 또 세 칸이다. 공사는 계축년 정월에 시작하여 무오년 3월에 마쳤으니 세월이 경과한 것이 7년이요, 공사비 또한 누백만이었는데, 재력을 넉넉하게 연출한 자는 또한 기록이 없어서는 아니되겠기에 별도로 돌에 새겨서 곁에 세운다. 희병(熙秉) 영배(英培) 두 군이 여러 종인의 뜻에 따라 재실의 기문을 태곤(泰坤)에게 맡겼다. 감당할 수 있는 바 아니나, 힘을 다해 일에 호응하는 것이 후손의 일이기에 그러므로 감히 이렇게 쓰노라. 신라기원 2036년 무오(1978) 3월 초하루 후손 태곤(泰坤) 삼가 씀 번역본 출처 : 밀양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