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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10월31일 월요일 4 (제190호) 관향조 종친회 △박성호(서울 송파구) △박영록 (동작구) △박병인(인천시 연수구) △박연희븡박해용(강원 동해시) △박 인근(충북 청주시) △박부규(충북 충 주시) △박봉순(충남 서천시) △박희 중(세종시) △박수환(경북 안동시) △박창균(경북 영천시) △박종백(경 북 포항시)△박상철(경북 예천군)△ 박복로. 박의묵(경북 청도 군) △박종 욱(경북 청송군) △박진하(대구 수성 구) △박동춘(대구 달서구) △박만순 (부산 연제구) △박영덕븡박남수(부산 수영구) △박문호븡박성국븡박재헌븡박 장제. 박능출(경남 창원시) △박래수 (경남 진주시) △박정영(경남 밀양 시) △박문갑(경남 통영시) △박채은 (경남 양산시) △박갑영(경남 산청 군) △박명호(경남 의령군) △박태식 (경남 사천군) △박철환(전남 장흥 군) △박종인븡박병순(전남 광양시) △박래호(전남 장성군) △박형상(전 남 고흥군) △박영희(제주시 애월읍) △박순원(제주한림읍) ◎서울 △박종모(광진구) △박석휘(송파 구) △박종태(성북구) △박근영(서초 구) ◎경기 △박영하(파주시) ◎강원 △박조균(강릉시) ◎충북 △박병영(청주시) △박기호(영동 군) ◎충남 △박경석(대전시) △박도신븡박순 태(천안시) △박철종(논산시) △박관 구(서천군)△박범인(금산군) ◎경북 △박병한(경산시) △박양한븡박재 양븡박용진(경주시) △박귀훈(포항 시) △박기준(울산시) △박기환(영주 시) △박후용(구미시) △박종운븡박재 대(안동시) △박정노(의성군) △박헌 규(청도군) △박운학븡박재대(의성군) △박종보븡박연수븡박원재(예천군) ◎경남 △박경묵븡박기종(진주시) △박태 주(통영시) △박도흠(양산시) △박원 규븡박영호븡박상룡븡박미옥(밀양시)△ 박대근(사천시) △박철곤(창원시) △ 박태봉븡박희구(의령군) △박종해. 박 태영(창녕군)△박덕해(고성군) ◎대구 △박정열(달서구) △박치원븡박종 석(북구) ◎부산 △박순학(동구)△박형만(사상구) ◎전북 △박헌근(김제시) △박성환 (전주시) △박세정(장수군) △박창구 븡박천수(고창군) ◎전남 △박일성븡박주일븡박병현븡박찬균븡 박길섭(광주시)△박주신(해남군) ◎제주 △박봉찬븡박승준븡박동렬(제주시) △신계서원 △박종송(상주박씨대 종회장) △박봉석(청주시, 전 아달라 왕릉 참 봉) △박길섭(수산사보존회 이사장) ※구소명종중에서 단체구독자(42 名)입금해주셨습니다. 한빛신문은성손여러분이함께 만들어가는소중한자산입니다 한빛신문은2007년창간이후선조님의행장과종중의약사집성촌,본관별세거지변천사등 수 많은자료를기록으로남기는방대한 작업을하고 있는‘성손모두가함께만들어가는종보’입 니 다.그역할을충실히하면서선조님의현창사업과후손들에게물려줄박문(朴門)의뿌리를연 구 하고다듬어데이터베이스화하는데앞장서겠습니다. 한빛신문임직원일 동 뱚뱚제보및구독신청안내:053-588-7300,070-4250-0078 ▶fax053-581-0067▶e-mail:parkss1012@han mail.net 뱚※성손여러분이납부하여주신구독료는신문발행에큰도움이됩니다. 월3,300원으로종보를함께만들어가는주인이되어주세요. 구독료를가까운금융기관에서자동이체(월3,300원)하여주세요 구독료 자동이체 계좌 453013-55-000691 농협한빛신문 [9월21일에서10월20일입금고객명단] 뱚▶자동이체등록해주신분 뱜▶지로납부및 농협계좌송금하여주신분 ※알려드립니다 ※△2022년9월30일자산림조합으로 입금해주신 박성익(박통시골밥상) 님. 6월 21일자 신한은행으로 입금해 주신박기태님. △3월 30일자 E-경남은행으로 입금 해주신 밀성박씨창산공추위원회님. △4월1일자 E-신한은행으로 박재식 님. △2월24일 국민은행 박중수(화곡동) 님. △2월 15일자 폰카카오로 입금해주 신박현규님. △2021년7월2일자E-우리은행한빛 신문구독료로입금해주신고객님. △4월 13일자 PC신한은행 3100로 입 금해주신고객님. △2월24일 국민은행 박중수(화곡동) 님. △12월11일국민은행박일남으로입 금하신 고객님께서는 신문사로 연락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TEL: (053)5 88-7300 뱜▶후원하여주신분 정조 무술년(1778) 태조를 도와 훈업을 이루어 보국숭록 대부 영중추부사에 오르고 단 서철권(丹書鐵拳)을 하사 받 은 후 벼슬을 사양하고 낙향하 여 후학교육에 힘써온 풍정공 박의룡 선생을 제향하기 위해 창사하였던 전남 무안의 병산 사가 지난달 26일(음9.1)배향된 육현(六賢)의 추모 제향을지역유림주관으로봉행되었다. 이날 제향은 오전 10시 개좌를 열어 제관 분정을 마치고 제물 봉진례를 거쳐 진설 한 후 김일우(金一 宇) 집례관의 창홀에 따라 김상풍(金常豊), 김정수 (金廷洙), 박갑수(朴甲洙) 씨가 차례대로 각각 헌작 하고,김상현(金庠弦)축관의독축으로이어졌다. 이후 분포례를 갖고, 강평을 통해 이날 제향을 점 검한 가운데 박민치 무안파 종회장은 잊지 않고 찾 아준 유림여러분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하고 종중에 서는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불편함이 없도록 하는데 힘쓸 것이라며 병산사 발전에 유림인들이 크게 기여 해줄것을당부했다. 병산사는 1778년 창건하여 풍정공을 배향하여 제 향을 받들어오다 1829년(순조29년)에 애한정 박익 경(1438~1520), 암천공 박증(1461~1517), 초정 박응 선(1575~1636)을 추배하였다. 1868년(고종5년)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된 후 1891년(고종28년)에 유지에 입비하여 제공의 유덕을 기렸다. 그 후 1918 년 후손들이 설단하여 제향하다가 1946년에 공론으 로 현 위치에 복설하였으며 1965년에 죽포 박기종을 추배하였고, 1987년 현 위치에서 약간 남쪽으로 터 를 잡아 한식과 양식을 겸한 철조 콘크리트 건물로 이건하였으며, 그해 8월 회일(晦日, 그믐날)에 은청 광록대부 상주국영동평장사이고 면성부원군에 봉 해진 문정공 박문오를 주벽으로 추향(追饗)하여 향 중유림이음9월1일향사한다. 창건당시 건물은 사우(祠宇) 3칸, 내삼문 3칸, 강 당(察倫堂)5칸, 외삼문 3칸,부속건물 4칸으로 구성 되었으며, 현재는 한옥 모형의 콘크리트 건물로 사 우 정면 3칸, 측면1칸의 맞배지붕이며 외문문 3칸이 며,경내에병산사유허비가있다. 강당인 찰륜당은 정면5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으 로 장소를 옮겨 경기묘 앞에 지어졌으며, 경기묘 및 병산사 제향 때 제관 분정 등 재숙소로 활용되고, 명 사초정 강의 등으로 서원의 본래 기능인 강학의 공 간이다. 한편 배향된 선현중 이번호에서는 주벽인 문정공 박문오선생을소개해본다. 문 정 공 은 밀 직 부 사 부 ( )의 3남 3녀 중 차 남 으 로 12 58년 태 어 났 다 . 호 는 면 남 (綿 南), 시 호 는 문 정 (文靖)으로 무안박씨 관향조 휘 진승의 6대손으로 대 대로 이어오는 명문세가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영 명(英明)하여후일크게쓰일재목으로촉망받았다. 충렬왕 때에 충량과(忠良科, 문과)에 급제하여 조 정에 나아갔다. 고려후기 몽고(元나라)의 침략을 받 아 고종이 강화도에 천도하여 40여 년 간 항쟁하였 으나 강화도를 제외한 전 국토가 유린당하고 항쟁에 실패하여 몽고와 강화한 이후 개경으로 환궁하나 몽 고의 간섭을 받는 속국이 되었다. 몽고는 무리한 공 물을 요구하고 공녀를 바치는 수모와 수탈의 역사가 시작되어 나라가 궁색하고 피폐해 갔다. 왕은 몽고 의 황녀와 혼인시켜 부마국이 되었으며, 왕들이 몽 고에 충성하라는 뜻에서 왕명에 충(忠)자를 쓰게 하 는 등 고려국은 자주국가로서 지위를 잃어가고 있을 때 공은 조정에 나가 혼신의 정성을 다해 공정함과 임금을 충성스럽기 보좌하여 문하시랑동중서문하 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이 이르렀으며 , 누란의 위기에서 사직을 안정시켰다고 인정되어 안 사공신(安社功臣)에오르고면성군(綿城君)으로 공 신호(功臣號)를 받았다. 후일 면성부원군(綿城府院 君)에추봉되었다. 만년에 무안으로 퇴거하여서는 정자를 지어 편액 (扁額)을 유산정(遊山亭)이라 하고 정자 밑에 연못 을 파서 생선지(生鮮地)라 이름 짓고 한가로이 여생 을 보냈는데 유산정 아래 면남정사(綿南精舍)를 지 어 송시독서(誦詩讀書)하며 후진양성에 더욱 심혈 을기울였다. 병산사추모제향봉행,지역유림주관 엄격한예법에따라배향된선현의정신기려 전남무안의병산사추모제향이지역유림주관으로지난9월26일봉행된가운데제향후제관이한자리에모였다. 김상풍초헌관이분향을하고있다. 박민치회장 고려조에 대과문과에 등과한 후에 한주지사(현 서울시장)을 지내고 역 성혁명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전 원으로 돌아가려 하였으니 도탄에 빠 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해 새 국가건 설에 국가민족을위해정치에참여하 여 대사헌의 중임을 맡아나라의법령 을 정하고백성의생활을안정시킨후 재상의 반열에 승차할 수있었으나부 귀공명을 버리고 전원으로 돌아와 고 매한 인품과 학문으로 사가 제현의 사표가 되 었던 대사헌공(휘 해) 귀림 선생의 신도비 제 막식과 수갈 고유제가 지난 15일 오전 10시부 터 선생의 묘역아래 자리한 대구 수성구 시지 동의 솔일재에서 지역 유림과 후손 등 300여 명이참석한가운데있었다. 이날 행사는 오전 10시 개좌를 열어 박보근 참봉을 직일로 선임하고 반수(班首)에 전봉진 (全鳳瑨) 유학자, 도집례에 풍산유씨 서애 유 성룡 선생의 후손 유시호(柳時浩)씨를, 상례 (相禮)에 오천정씨 호수공종친회장과 전 경북 대 사무처장 정돈식(鄭敦植)씨를 선임하는 절 차를 밟아 초헌관에 경주최씨 백불암 선생의 종손 최진돈(崔晉敦), 아헌관 오천정씨 매산 선생 후손 정동재(鄭東在, 한학자), 종헌관 전 창종(全昌鍾),축관유영수(柳榮洙)전경북대 한문학 교수를 각각 선임하여 순천인 박종우 서재문화사 대표의 집례로 솔일재 정당에서 예학의 대가 창릉 박용진 선생의 윤자 경해 현 종의 지도와 유사를 맡은 창태 현종이 찬창을 맡아 유가의 전통예법에 따라 고유제를 봉행 한후기념식과제막식이차례대로이어졌다. 기념식에서는 정철(廷鐵) 대사헌공 문중회 장의 인사와 수성구의회 김영태 의장이 외빈 축사를 하였다. 정철 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강 호제현과 일가분들을 모시고 대사헌 귀림공 의 신도비 수갈 고유를 하게 되어 감개무량하 다며 귀림 선조께서 국가와 지역사회에 끼친 영향이 영원불변하여 후세에 귀감이 되었으 면 한다고 하였으며, 김영태 의장은 후윤(後 胤)들은물론많은우리이웃들에게귀감이되 는문화자원이되길바란다고축하했다. 유공자 표창에는 황등종합석재 박성룡 대 표, 대신석물 김종석 대표에게 감사패를 전달 하고 공로패 전달은 추진위원장 박동식, 기단 석 축조 공사비 전액을 부담한 종부시정공 문 중(대표 일섭)을 비롯 과천현감공 문중(대표 보근), 청풍당종회(대표 덕환), 괴하장학회 (회장 관동),행사 답례품을 협찬한 실용·진우 형제분에게각각전달되었다. 이번 신도비 건립은 당대에 동방급제 한 동 년들이 한 가문의 현조가 되고, 정평공(성석 연), 정정공(정구)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시호를 받았으나 공께서는 명리를 탐하지 않 는 청 렴 강 직 한 성 품 이 이 어 져 서 손 자 대 에 6 형제분이 대·소과에 등과한 영예와 증손·현손 양 대 분이 시장(시호)를 관장하는 봉상시주 부직에 있었고, 후손이 대과 문과하여 당상관 이상에 사환하였으나 공의 정신을 이어받아 서 시호와 신도비가 없었던 사유가 되었고,오 랜 세월과 병화로 인하여 문적은 소멸되고 겨 우 가승으로 전해 오는 안타까운 현실에 2021 년 3월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향회·도회·도 내 등에 통문을 보내 유림들의 의결로 오천인 매산 정선생의 후손인 한학자 정동재 선생에 게 의뢰하고 전액 글씨는 남양인 홍제환 선생 의글씨로건립하게되었다. 대사헌공의 휘(諱)는 해( ), 호(號)는 귀림(歸林)으로 홍건적란(紅巾賊亂)을 평정 공민왕14년(1365)에 숭록대부 문하시중과 보 문관대제학(寶文館大提學)에 오르고 녹훈(錄 勳)으로 보리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輔理功 臣 大匡輔國 崇祿大夫)를 추증(追贈)받고 밀 직부원군에 봉해져 시호가 문숙공인 휘 중미 (中美,호 竹隱)의 차자(次子)이다. 1347년(충목왕 3년)에 태어나 30세가 되던 1377년(우왕3)에 문과에 급제하여 조선이 건 국되자 벼슬이 대사헌에 이르러 왕의 명령에 응하여 그 뜻을 일반에게 선양(宣揚)하고 흉 금(胸襟)을 털어놓고 큰 계책을 펴도록 성의 껏 인도하기를 극진하게 하지 않은 바가 없었 으니 곧 기강이 바로 세워졌다. 그리고 대사헌 으로서 장래가 촉망받는 위치에 있음에도 공 명을 멀리하고 전원으로 돌아갈 생각이 간절 하여 글을 읊고 전원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하 여 청주 계림촌으로 우거한 것을 보면 결국 자 연으로 돌아온다는 귀림(歸林)을 자호(自號) 로 한 연 유 이 기 도 한 것 으 로 짐 작 해 볼 수 있 을 것 같다. 이후 다시 영남의 경산현 고산방 (孤山坊) 내매리(內梅里)로 이거하여 그곳에 서 만년을 보내고 졸하여 유택은 천법동(시지 동산11번지)유좌(酉坐)에있다. 문중의 역사를 상고(詳考)해 보면 세거지를 옮길 때 주로 선조님과 인연이 있는 곳이나 스 승과 교유하는 벗, 그리고 혼인관계로 나누어 지는데 대사헌공의 경산 내매리의 입향은 아 버지의 유택과 사패지가 있는 청도와 가까운 거리이고,처가(妻家)옥산전씨와 동서(同壻) 인 아산장씨(蔣興膚)와의 인연으로 인한 것으 로추측해본다. 이로인해 ‘옥산전씨’, ‘아산장씨’, ‘밀양박 씨’ 세 가문은 삼공(三公)의 유지승계를 위한 강선계(講先契)를 맺어 600여년을 이어 매년 음력4월10일을기해삼(三)선생의위대하신 업적을 추모하며 후손간 친목을 돈독히 해오 고 있 어 이 날 행 사 에 도 돈 돈 한 우 정 을 드 러 내 보이기도하였다. 대사헌공은 옥산전씨와의 사이에 아들 울 (蔚)을 두었는데 통훈대부 행 단성현감을 역 임하였으며, 아들 계조(繼祖), 승조(承祖), 사 조(嗣祖) , 찬조(纘祖), 순조(順祖), 현조(顯 祖) 등 6형제를 두고 이들이 각각 대·소과에 등과하면서 크게 번성하여 현재 6천여 호에 이르며, 조선조에 청백리 1명, 공신녹권 8명, 대과 20명, 생원진사 50명, 수령방백과 효자, 열녀는 다 열거할 수 없으며,학자로 문집간행 25명이고,난신적자는 한명도 없고,국난에 보 국 충성하여 이시애 난 평정에 3명이 원종공 신에 책록 되고, 임진·정유왜란에 선무원종공 신으로 8명이 녹권을 받았으며, 창의와 무관 으로 수 십 명이 왜적을 토평하고 병자, 정묘 호란에도 참전하여 사란창의록에 등재되어 있으며,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에도 수 십 명 의 후손이 참여하였다. 특히 대한광복회 총사 령관 고헌 박상진 의사와 신흥무관학교를 나 와 임시정부 구제총회장과 독립선봉대총대장 을 역임한 박상진 의사 같은 분은 청사에 길이 남을위인으로기록되고있다. /박상섭편집국장(parkss1012@hanmail.net) 대사헌공(휘해)귀림선생신도비제막및수 갈고유제봉행 대사헌공 박 해 선생 신도비 수갈고유제가지난15일공의분암솔일재에서지역유림주관으로봉행되었다. 지역유림과종원등300여명충(忠)·효(孝)·학(學)을두루겸비한공(公)의업적과사 상기려 고유제 제관 왼쪽부터 최진돈, 정동재, 전창종, 유영수, 박종우順 박정철 회장이 박동식 추진위원장에게 공로패를 전달 하고있다. 박정철 회장(左)이 기단석 축조 공사비 전액을 부담한 종 부시정공문중박일섭회장에게공로패를전달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