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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9월30일 금요일 4 (제189호) 재실탐방 △박성호(서울 송파구) △박병인 (인천시 연수구) △박연희븡박해용(강 원 동해시)△박인근(충북 청주시)△ 박부규(충북 충주시) △박봉순(충남 서천시) △박희중(세종시) △박수환 (경북 안동시) △박창균(경북 영천 시) △박종백(경북 포항시) △박상철 (경북 예천군) △박복로븡박의묵(경북 청도군) △박종욱(경북 청 송군) △박 진하(대구 수성구) △박동춘(대구 달 서구) △박만순(부산 연제구) △박영 덕. 박남수(부산 수영구) △박문호븡박 성국븡박재헌븡박장제븡박능출(경남 창 원시) △박래수(경남 진주시) △박정 영(경남 밀양시) △박문갑(경남 통영 시) △박채은(경남 양산시) △박갑영 (경남 산청군) △박명호(경남 의령 군) △박태식(경남 사천군) △박철환 (전남 장흥군) △박종인븡박병순(전남 광양시) △박래호(전남 장성군) △박 형상(전남 고흥군) △박영희(제주시 애월읍)△박순원(제주한림읍) ◎ 서 울 △박길상(영등포구) △박재호. 박 신일(중랑구) △박상숙(노원구) △박 상국븡박종돌(관악구) △박문도(강남 구) ◎경기 △박재국(인천시) △박기하(광명 시) △박준섭(고양시) △음성박씨사 인공파종중(의왕시) △박성현(포천 시) △박수익(여주시) △박명섭(구리 시) △박정국(군포시) △박용상(양평 군) ◎강원 △박종후븡박동수(강릉시) △박용 선(원주시)△박형배(삼척시) ◎충북 △박용(진천군) ◎충남·대전 △박종현(대전시) △박중식(공주 시) ◎경북 △박순대븡박정래(포항시) △박수 식븡박순도(경산시) △박금동븡 박삼희 (경주시) △신라오릉영천지부(영천 시) △박흥렬븡박시형븡박인석(울산 시) △박원구(안동시) △밀양씨박경 주부윤공파(구미시) △박순은븡 박순 묵(청도군) △박 모(군위군) △박재 로(영덕군)△박찬은(예천군) ◎경남 △박호열븡박희정븡박윤옥(밀양시) △박주곤(양산시) △박희간(창원시) △박외근(창녕군) △박현보(거창군) △박영양(하동군)△박순근(함양군) ◎대구 △박윤도(동구) △박상규(서구) △ 박노칠븡도태기븡박상준븡박백만(달서 구) ◎부산 △박성철(연제구) △박무종븡박사 자(해운대구) △박봉제(금정구) △박 계청(영도구) ◎전북 △박경열(전수시) △박흥식븡박진 식(김제시) △박성순(정읍시) △박세 근(고창군) ◎전남 △박인섭븡박남근(광주시) △박재 봉(담양 군)△박석노(무안군) △졸당공파대종회 △복야공파대종 회△무안박씨대종회 한빛신문은성손여러분이함께 만들어가는소중한자산입니다 한빛신문은2007년창간이후선조님의행장과종중의약사집성촌,본관별세거지변천사등 수 많은자료를기록으로남기는방대한 작업을하고 있는‘성손모두가함께만들어가는종보’입 니 다.그역할을충실히하면서선조님의현창사업과후손들에게물려줄박문(朴門)의뿌리를연 구 하고다듬어데이터베이스화하는데앞장서겠습니다. 한빛신문임직원일 동 뱚뱚제보및구독신청안내:053-588-7300,070-4250-0078 ▶fax053-581-0067▶e-mail:parkss1012@han mail.net 뱚※성손여러분이납부하여주신구독료는신문발행에큰도움이됩니다. 월3,300원으로종보를함께만들어가는주인이되어주세요. 구독료를가까운금융기관에서자동이체(월3,300원)하여주세요 구독료 자동이체 계좌 453013-55-000691 농협한빛신문 [8월21일에서9월20일입금고객명단] 뱚▶자동이체등록해주신분 뱜▶지로납부및 농협계좌송금하여주신분 뱚※알려드립니다 뱚△2022년 6월 21일자 신한은행으 로 입금해주신 박기태님. 뱚△3월 3 0일자 E-경남은행으로 입금해주신 밀성박씨창산공추위원회님. 뱚△4월1일자 E-신한은행으로 박재 식님. 뱚△2월24일 국민은행 박중수(화곡 동)님. 뱚△2월 15일자 폰카카오로 입금해 주신박현규님. 뱚△2021년 7월 2일자 E-우리은행 한빛신문구독료로 입금해주신고객 님. 뱚△4월 13일자 PC신한은행 3100 로 입금해주신고객님. △2월24일국 민은행박중수(화곡동)님. 뱚△12월 11일 국민은행 박일남으로 입금하신 고객님께서는 신문사로 연락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TEL: (053)588-7300 뱜▶후원하여주신분 지금의 추모재는 1930년 건립되었는데 이전의 기록은 전해 지지 않아 알 수 없다.그러나 죽포공 종중의 세거지 변천에서 찾을 수 있다. 죽포공(휘 간형, 1638~1700)은 전남 창평향교 진사답을 만들어 성균관에 들어간 진사들의 학비걱정을 덜어 주는 등 문풍을 크게 일으킨 고직당공 휘 영철(英喆)의 차남 으로 선무랑에 오른 휘 정련(廷璉)의 아들 6형제 중 다섯째이 다.1638년(인조16)전남 창평현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내고 전북순창으로이거해세거지를이룬다.당시옥천(현순창금 과면 대장마을)에는 서당터로 학문이 뛰어난 사람들이 많아 교유하고자 하는 문맥을 찾은 것이다. 그리고 재향공간인 추 모재 우측에 고종조에 사헌부 감찰(고종24 4월 25일 발령)을 지낸 박창열 선생의 영정을 보관하고 있어 가문과 무계정사 의 내 역 또 한 유 추 해 볼 수 있 다 . 무계정사는 빼어난 경치만 큼이나 많은 시인묵객들이 시 문을읊고 때로는 정세를 논하 는 등 사대부들의 활동이 두드러졌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강 점기 일제는 우리말 말살정책을 펼치고 지식인들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면서 시인묵객의 활동은 제약을 받았고, 1930년 중건하면서 순수제향공간인 추모재로 편액하고 무계정사의 편액은 집성촌인 팔덕면 청계마을에 무이산 아래 거사 박정 식이 세운 서당으로 옮겨졌고, 해관 윤용구 선생이 편액을 썼 다. 1960년 초까지 후학양성에 매진하다 신학문에 밀려 문을 닫은 후 추모재 출입문을 신축하면서 무계정사의 편액을 옮 겨 달았다.박정식(朴正植)의 자는 정현 호는 우헌,효자 박경 원의 후손이며 감찰 박창열의 아들로 벼슬은 승사랑으로 세 자시강원시종이었다. 추모재는 전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형태이고 사방에 한 칸 의 툇 마 루 를 두 고 , 전 면 3 칸 측 면 2 칸 의 방 을 놓 았 다 . 좌 측의 방은 죽포공 이하 선조의 위패를 봉안하였고, 우측 방에 는 고 종 때 사 헌 부 감 찰 을 지 낸 죽 은 (竹 隱 ) 박 창 열 선 생 의 영 정을 봉안하고 있다. 대문과 협문이 있는데 협문은 관리사에 서드나들기쉽도록한것이다. 죽포공 휘 간형(艮亨) 은 전남 창평향교 진사답 을 만 들 어 성 균 관 에 들 어 가 공부하는 학동들에게 학비부담을 덜어주면서 많은 인물을 배출하는 등 문풍을 크게 일으킨 고직 당공 휘 영철(英喆)의 차 남으로 선무랑에 오른 휘 정련(廷璉)의 아들 6형제 중 다섯째로 1638년(인조 16) 전남 창평현에서 태 어나 유년기를 보내고 전 북 순창군 금과면 대장리 로 이 거 하 면 서 순 창 에 처 음입향하였다. 처음 입향지인 금과면 대장마을은 약400여 년 전 에 유 명 한 설 엽 학 자 (薛燁 學子)의 서당(書 堂)터이며 학문이 높아 전국각지에서 모여든 선 비들을 가르쳐 과거(科擧)에 많은 사람들을 급제(及第)시켜 훌륭한 제자(弟子)들이 많이 배출(輩出)되었다 특히 전라도 에서는이선생의추천(推薦)없이는과거를치를수없었다하 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곳이기에 죽포공 또한 학문의 연 원을찾아이거한후정착하게되었던것이다. 이후 죽포공의 손자 휘 문선(文善)에 이르러 팔덕면 월곡으 로 이주하여, 죽포공의 7世 휘 경원(慶元)이 팔덕 청계 죽림 촌으로이주하여지금에이른다. 고직당공(휘 영철)의 字는 숙명(叔明)으로 1566년에 태어 나 1659년 졸(卒)하였다. 인조2년 (甲子) 1624년에 진사가 되 었고 癸酉 1633년 文科에 올라 벼슬은 병조좌랑 승문원교검 과 통정대부승정원승지 겸 동지중추부사 영춘현감을 역임하 였으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아침에는 도연명의 율리(栗里) 국화를 삼켰고 저녁에는 백이숙제의 수양산(首陽山) 고사리 를 먹었다는 싯구를 남겼다. 효성과 우애가 독실한 가정에 있 을 때 아우 진재공(眞齋公)과 함께 9년 동안 시묘살이의 효행 이 있었고 임금을 섬길 때는 네 차례 진언(進言)하는 충성(忠 誠)이 있었으니 종묘(宗廟)제례(祭禮)와 위차의 차질(差跌) 을 바로잡아 라는 상소문이 첫 번째요. 광해(光海)가 계모인 인목대비를 폐위하는데 항거하는 상소문이 두 번째요. 당시 언론이 임금의 비리를 막아주려 한다는 상소문이 세 번째요.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위하여 큰 아들을 군왕으로 세워야 한 다는상소문이네번째이다. 국가의 현재와 미래를 위하여 신하된 충성을 다하고 향리 (鄕里)에 돌아와 기옹(畸翁) 정홍명(鄭弘溟) 명곡(明谷) 오 희도(吳希道)와 도의지교로 지내면서 창평향교에 수죽헌(數 竹軒) 조홍립 선생과 협력하여 서탁을 마련하였는가 하면 진 사답(進士畓) 300여두락(三百餘斗落)으로 후진(後進)교육 에 면려(勉勵)하였기에 세상 사람들은 충효학(忠孝學)을 겸 한 청결(淸潔)선생 또는 창평향선생(昌平鄕先生)이라 칭송 하며기적비를세워기린다. 특히 타고난 효자이다.광해군의 폭정과 소인배들의 행패에 식상한 나머지 과거에 뜻을 접었으나 계모를 즐겁게 해드리 기 위해 인조반정이후 갑자(甲子 : 서기 1624년)에 사마시(司 馬試 : 진사와 같음)에 합격해서 능참봉(陵參奉)이 되었고 계 유식년(癸酉,1633) 式年試(식년은 정기적인 과거시험)때 나 이67세에급제하여어머니를즐겁게해드렸다. 고직당공의 손자 죽포공은 고매한 성품으로 뛰어난 학문을 겸비하여 사림의 추앙을 받았으며, 그의 증손 휘 용근(龍根) 은 절충장군 용양위부호군(折衝將軍龍攘衛副護軍), 부호군 의 아들휘 순학(順鶴)은 통훈대부 사복시정(通訓大夫司僕寺 正) 그의 아들 천곤(天崑)은 통정대부좌승지겸 경연참찬관 (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에증직되었다. 청계죽림촌에 입향한 휘 경원은 효성이 출천(出天)하여 어 려서부터 부모님 섬기기를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아 드리고 아침에는 문안을 드리는 등 아침저녁으로 정성스럽게 보살펴 왔다. 나물캐고 낚시하여 맛있는 음식이 떨어짐이 없게 하였고, 비록집안에세세한일이라도반드시고(告)하여자유로아니 하고 여력(餘力)으로 학문에 힘써 경사(經史)를 널리 통(通) 하였다. 아버지 상(喪)을 당하여 통곡의 슬픔과 수렵하는 례(禮)에 고인(古人)의능하지못한바를실천하니이웃사람들이칭찬 하였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므로 지극히 비통하게 여겼고, 능히 편 모(偏母)를섬김에정성을다하였으나어머니가모진병을만 나 위태로워 백약이 무효로 생명이 위태로워 곧 손가락에 피 를 내어 드리니 금방 회생하여 그 후 10여년을 살다가 또 병이 재발하여 곧 임종하려함에 볼기살을 베어 약과 같이 드리니 5 일간 명(命)을 연장하였다.상사(喪事)를 당하여 상복을 입고 맨밥을 먹으로 3년을 피눈물로 지냈다. 그리고 언제난 기일 (忌日)에는 호곡하여 슬퍼하기를 초상시와 같이 하였으니 이 는종신토록부모를사모한것이다. 이에 지방 유림들의 상신(上申)하여 1905년(고종41) 정려 가 내려지고 가선대부 호조참판 동지의금부사에 증직되었 다. 효자공(휘 경원)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장자 영열(永烈)은 가학을 이어 학문이 뛰어났고, 차남 성열(誠烈)은 동지중추 부사, 셋째 창열(昶烈, 1825~1900)은 고종조에 사헌부감찰을 지냈다. 이처럼 선대의 훌륭한 업적과 음덕은 후손들에게 고스란히 이어져 100여 세대로 번성하여 지난 2008년 순창 입향조인 죽 포공의 사적비를 마을 앞 입구에 세워 숭조사상을 함양하고 전통적인효사상을고취시키고있다. 특히 집행부 임원진(회장 근호)의 연령을 낮추면서 위선사 업과 애종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종중의 시설을 정비하 고 부동산의 공부상정리를 완벽하게 갖추고 추모재를 찾아 하계수련회를 갖는 등 타 문중의 모범을 보이고 있어 지역에 서칭송이뒤따른다. 偶扶藜杖出寒谷(우부려장출한곡) 우연히청려장짚고찬골짝이나서니 月滿空山水滿潭(월만공산수만담) 공산에달빛가득연못엔물이가득하구나 客來倚 岩花落(객래의최암화락) 손님오시다기대서자바위꽃떨어지고 又枉藍與度遠岑(우왕람여도원잠) 다시가마타고먼뫼를지나오시네 萬里雲烟陋老眼(만리운연귀노안) 만리(萬里)운연을노안(老眼)으로돌아보니 千年形勝接中州(천년형승접중주) 천년세월형승이읍내까지닿아있네 環視森松春雨外(환시삼송춘우외) 솔숲은봄비밖에둘러쳐보이소 遙聞笙鶴曉雲中(요문생학효운중) 새벽구름에학울음멀리들리네 武溪寒月天年在(무계한월천년재) 무이계곡찬달이천년을떠서한가로움에서 朱子遺風四海同(주자유풍사해동) 주자의끼친바람사해(四海)에한가지일세 眞元定自閑中得(진원정자한중득) 진원(眞元)은정히한가한속으로부터얻고 妙用元從樂處生(묘용원종락처생) 묘용은본디즐거운곳으로좇아나오는것 自喜軒敖無俗韻(자희헌창무속운) 속된없는헌창을스스로기뻐하니 亦知草木有眞香(역지초목유진향) 초목에도참향기있음을또한알겠노라 무계정사(武溪精舍)와추모재(追慕 齋) 전북순창군강천산길8-1(청계리926-1) 강천산군립공원입구의추모재 추모재는강천산의빼어난절경에견줄만큼아 름다움을 선보이고 있다. 추모재의 또 다른 이 름은 무계정사(武溪精舍)이고 밀성(밀양)박씨 죽포공 종중의 재사(齋舍)이기도 한다. 주련에 도 나타나듯 중국 푸젠성(福建省) 무이산(武夷 山)계곡의아름다움을묘사하였고주자의유풍 (遺風)이끼쳤다.라고하고있어많은시인묵객 이 함께하며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후학들의강 학의전당이었음을알수있어소개해본다. 무계정사와추모재연혁 추모재전경 추모재규모 측면에서본추모재 뒤편에도툇마루가있다. 죽포공의후예 감찰공박창열존영 추모재주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