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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2월28일 월요일 4 (제182호) 관향조 종친회 △박성호(서울 송파구) △박병인(인천시 연수구) △박연희, 박해용(강원 동해시) △박 인근(충북 청주시) △박봉순(충남 서천시) △ 박희중(세종시) △박창균(경북 영천시) △박 종백(경북 포항시) △박상철(경북 예천군) △ 박복로븡박의묵(경북 청도군) △박종욱(경북 청송군) △박진하(대구 수성구) △박만순(부 산연제구) △박영덕븡박남수(부산수영구) △ 박문호븡박성국븡박재헌븡박장제(경남 창원시) △박래수(경남 진주시) △박정영(경남 밀양 시) △박문갑(경남 통영시) △박갑영(경남 산 청군) △박명호(경남 의령군) △박태식(경남 사천군) △박철환(전남 장흥군) △박종인(전 남 광양시) △박래호(전남 장성군) △박형상 (전남 고흥군) △박영희(제주시 애월읍) △박 순원(제주한림읍) ◎ 서 울 △박 승(종로구) △박지덕(서초구) △박광 래븡박기선븡밀양박씨 해백공파종중(중구) △ 박현수(은평구) △박노권(동대문구) △박원 배(서대문구) △박동규(중구) △박노선(중량 구)△박노정(강서구) ◎경기 △박수웅븡박상은븡박병직븡박흥식븡박수천 (성남시) △박해만븡박종도(수원시) △박원상 (용인시) △박종수(파주시) △박춘식(이천시) △박임용. 박장서(인천시) △박전수븡박병준 (부천시) △박경준. 박상휴(화성시) △박병태 (고양시)△박명환(광명시)△박세근(양평군) ◎강원 △박수준븡박병일(원주시) △박덕식븡박병 일(횡성군) ◎충북 △박자원(충주시)△박종태븡박기천븡박재 호(청주시) △박기종(옥천군) △밀양박씨종 친회사무실(영동군) △박유식(괴산군) △박 영복(단양군) ◎충남 △박정길븡박상용븡박용철븡박희룡븡박한우 (대전시) △박성태븡박석순(세종시) △박노규 (당진시) △박상은(금산군) △박종인(서천군) △박권배븡박노산븡박성옥(홍성군) ◎경북 △박병천븡박성배(구미시) △박해주(안동 시) △박병립븡밀양박씨정재공파문중븡박남균 (경산시) △박한수(상주시) △박연화(영주시) △박수필븡박원삼(울산시) △박동환(포항시) △박현수븡박철규븡박희환븡박종우븡박주정븡박 상억(청도군) △박현정(합천군) △박노인븡박 홍기(봉화군) ◎경남 △박두완븡박수행븡박쾌기븡박영선븡박희학 븡박지석븡박호정(밀양시) △박수청븡박양현븡 박용덕븡박원홍븡박진홍븡박영록븡박홍식(창원 시) △박용수븡박정식븡박윤덕븡박태인븡박영두 븡박방석(진주시) △박종복븡박영곤(김해시) △박종환(양산시) △박욱제(산청군) △박성 만(의령군) △박창홍. 박기태(고성군) △박충 섭(남해군)△박광호븡박영부븡박상열븡박희성 븡박상헌(창녕군) △박오영븡박현정(합천군) △박종옥븡박규식븡박영덕(하동군) ◎대구 △박재균븡박종명(동구) △박동광(수성구) △박재기븡박재한븡박철성(달서구) △박정용 (북구) △박상헌(남구) △박영태븡박태수(달 성군) ◎부산 △박또갑주븡박청길(연제구) △박영철(금 정구) △박경우븡박용도븡박건웅븡박지택(부산 진구) △박무수븡박갑주븡박진국븡박준조(사상 구) △박승근(사하구) △박순우븡박영포(강서 구) △박영호븡박호근(동래구) △박무웅(동구) △박종우(해운대구) △박재술븡박구봉(남구) △박정학(서구) ◎전북 △박윤걸븡박상진(남원시) △박금용븡박종 신븡박종식(정읍시) △박영주(전주시) △박래 상븡박철용(부안군) △박천일븡박병열(고창 군)△박내영(익산군) ◎전남 △박홍민븡박병호(순천시) △박지현(나주 시) △박인기븡박병기(광양시) △박영진(화순 군) △박종삼(신안군) △박정옥븡박일용븡박 종필(완도군) △박 용(영암군) △박상곤(장성 군)△박종봉(강진군)△박종하(장흥군) ◎광주 △박원해(동구) △박형순븡박재순(서구) △ 박래선븡박형기(북구)△박병현(광산구) ◎제주 △박성호븡박재홍(제주시) △박지홍븡박규 남(애월읍) △박동창(태백시), 태백시지부, 부산본부, 서울특별시본부 ※춘천박씨 선기공종회 단체구독자(70名) 입금해주셨습니다. ※박성율님께서 해백공파(10名), 밀양박씨 도사공종중(10名), 신라오릉본존회 서울본 부(5名)입금해주셨습니다. 한빛신문은성손여러분이함께 만들어가는소중한자산입니다 한빛신문은2007년창간이후선조님의행장과종중의약사집성촌,본관별세거지변천사등 수 많은자료를기록으로남기는방대한 작업을하고 있는‘성손모두가함께만들어가는종보’입 니 다.그역할을충실히하면서선조님의현창사업과후손들에게물려줄박문(朴門)의뿌리를연 구 하고다듬어데이터베이스화하는데앞장서겠습니다. 한빛신문임직원일 동 뱚뱚제보및구독신청안내:053-588-7300,070-4250-0078 ▶fax053-581-0067▶e-mail:parkss1012@han mail.net 뱚※성손여러분이납부하여주신구독료는신문발행에큰도움이됩니다. 월3,300원으로종보를함께만들어가는주인이되어주세요. 구독료를가까운금융기관에서자동이체(월3,300원)하여주세요 구독료 자동이체 계좌 453013-55-000691 농협한빛신문 [1월21일에서2월20일입금고객명단] 뱚▶자동이체등록해주신분 뱜▶지로납부및송금하 여주신분 ※2022년 2월 15일자 폰 카카오 로 입금해주신 박현규님과 202 1년 7월2일자E-우리은행한빛 신문구독료로 입금해주신 고 객님과 2021년 4월 13일자 PC 신한은행 3100로 입금해주신 고객님, 그리고 2021년 12월 11 일 국민은행 박일남으로 입금 하신 고객님께서는 신문사로 연락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TEL:(053)588-7300 뱜▶후원하여주신분 고려벽상공신 박춘 선생은 고려공민왕조의 충신이다. 선대 는 고려조에 출사하여 관리(官吏)로 개경에서 거주하여 왔다. 그러나 공민왕조의 요승 신돈의 문란한 혼정(昏政)에 맞서 항 소를 올리다 오히려 산돈의 사전검열에 발각되면서 최영장군 을 비롯한 구가세족을 징벌한다는 명분으로 광양으로 유배를 가고 이후 울주의 열엄사에서 신돈이 보낸 부하들에 의해 살해 되어울주앞바다에수장되고모든재산을몰수해버렸다. 부인과 1남1녀의 가족 중 딸은 하동인 정지(시호 경열)장군 에게 출가한 후였기에 부인과 아들 인지(麟趾)는 정지 장군에 게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정지 장군은 나주출신으로 최영·이 성계 장군과 함께 고려 말 최고의 영웅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븮조선왕조실록븯에는 뷺정지 장군은 최초로 전함을 건조해 왜구 를 토벌했으며 수군의 창설이 ‘정지’로부터 시작되었다뷻라고 기록하고있다. 정지장군의 묘가 지금의 광주광역시 북구 망월동 산176에 있고 그 밑에 경열사가 있어 박춘 선생의 아들이 정지장군의 묘역 아래 진입로 부근 망월동 분토마을에 세거지를 두었다는 설을뒷받침한다. 이처럼 개경에서 내려와 분토마을에 자리 잡은 휘 인지는 태 종조에 출사하여 문과를 거쳐 나주목사를 지냈고 좌찬성에 증 직되었으며, 그의 아들 정손, 시손, 형손 모두 관직에 나갈 수 있었다. 장남 정손은 분토에 남고 셋째 형손은 안동으로 이주 해 갔다. 안동으로의 이주는 조부 좌상공이 공민왕의 안동 파 천(播遷)에 호종하면서 안동지역 문인들과 많은 교류를 하였 기때문이다. 좌찬성의 장남 휘 정손은 고창현감과 낙안,예산군수를 지내 고 아들 번(蕃)·무(茂)·중(仲)·계(季)4형제를 두었는데 첫째 와 둘째는 옛집 분토마을에 거주하고 셋째와 넷째는 후사가 전 해지지않는다. 장자 휘 번(蕃)은 만령(萬齡)·희전(希筌)·천령(千齡) 삼형 제를 두었는데 장남 만령과 차남 희전의 후예가 현재 금단동에 세거하게 된다. 셋째 천령의 후손들은 경북 경주로 이거해 같 다. 휘 번의 호는 의재(毅齋) 성종4년(1473년)에 태어났고 묘 소는 광주 북구 화암동 선영이고, 부인 정부인 광산김씨 묘소 가 처음 금단동에 모셔져 있어 의재공이 말년에 금단마을에 들 어가면서마을이형성되었을것으로추정한다. 그리고 이재공의 장남 만령의 호는 요당(樂堂)으로 조산대 부 선공감 직장이고, 차남 희전은 성균 진사인데 그의 후손들 은 일부는 금단마을 인근에 남고 일부는 전남 구례를 거쳐 전 북남원으로이거해큰집성촌을이룬다. 이재공이 금단마을에 들어가 마을이 형성하면서 그의 후손 들 또한 창평지역을 선도하는 선비로서 자리 잡는다.이재공의 손자 휘 대인(大仁)의 자(字)는 원경(元卿 ) 호는 도암(陶庵) 으로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광릉참봉이다.효우가 남다르고 타 고난 효자로 조정에서 가상히 여겨 훈도를 제수하였으나 아버 지요당공의여묘로인해나아가지않았다. 도암공의아들홍정(洪禎)의호는송고(松皐)성균진사이고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에 증직되었는데 이는 아들 고직당공 으로인해서다. 송고공은 아들 4형제를 두었는데 첫째는 영철, 둘째는 준철, 셋째는언철,넷째는문철이다. 장자 휘 영철(英喆)은 字는 숙명(叔明)이고 명종21(丙寅 15 66)년에 태어났다.인조2(甲子,1624)년에 進士가 되었고 1633 년 文科에 올라 벼슬은 병조좌랑 승문원교검과 통정대부승정 원승지겸 동지중추부사 영춘현감을 역임하였으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아침에는 도연명의 栗里 국화를 삼켰고 저녁에는 백 이숙제의首陽山고사리를먹었다는싯구를남겼다. 효성과 우애가 독실한 가정에 있을 때 아우 眞齋公(휘 준철) 과 함 께 9 년 동 안 侍 墓 살 이 의 孝 行 이 있 었 고 임 금 을 섬 길 때 는 네 차례 진언하는 충성이 있었으니 종묘 제례와 위차의 차질을 바로잡아 라는 상소문이 첫 번째요.광해가 계모인 인목대비를 폐위하는데 항거하는 상소문이 두 번째요.당시 언론이 임금의 비리를 막아주려 한다는 상소문이 세 번째요.종묘사직을 위하 여 큰 아들을 군왕으로 세워야 한다는 상소문이 네 번째이다. 국가의 현재와 미래를 위하여 신하 된 충성을 다하고 향리에 돌아와 기 옹 정홍명 명곡 오희도와 도의지교 로 지내면서 창평향교에 수죽헌 조 홍립 선생과 협력하여 서탁을 마련 하였는가 하면 진사답(進士畓) 300 여 두락으로 후진교육에 면려(勉 勵)하였기에 세상 사람들은 忠孝學 을 겸한 청결(淸潔 선생 또는 창평 향선생(昌平鄕先生)이라 칭송하였 다. 이에 오는 봄 선생의 기적비를 창평향교 마당에 건립하기 위해 준 비가한창이다. 고직당공의 후예는 증손과 현손 대에 이르러 전남 순천, 곡성, 전북 순창등으로이거해갔다. 차남 준철(俊喆)의 호는 진재(眞 齋)음으로 통덕랑이며 지극한 효자 이다. 형 고직당공이 관직에 충실할 수 있도록 지극정성으로 어머니를 모시었으며, 후손들은 전북 순창을 거쳐 현재 전남 곡성군 입면 만수리 에 세거한다. 셋째 언철(彦喆)의 호 는 정재(靖齋) 음(陰)으로 통덕랑 이고 호조참의에 증직되었는데 후 손들은 전북 순창, 전남 담양, 승주 로 이거해 갔다. 넷재 문철(文喆)의 호는 회옹(晦翁)으로 음(陰)으로 통덕랑이다. 후손들이 현재 금단동에세거한다. 이처럼 금단동은 현재 회옹공 후손들의 오랜 세거지가 되었 으며, 이후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의재공의 차남 진사공 의 후예 몇 세대가 금단동에 이주하여 함께 형제의 정을 나누 고있다. 회옹공의 후예들은 조선조에 많은 명현 석학을 배출하였으 며, 근세에도 뛰어난 인물들이 즐비하다. 이중 종손 형석이 사 업가로 성공을 거두었으며, 서울 서초동에서 변호사로 활동하 는박창한변호사를들수있다. /글븡사진박상섭 편집국장(parkss1012@hanmail.net) 뱚집성촌탐방 전남담양군고서면금현리금 단마을 밀성박씨좌상공후이재공종중550년세거지 전라남도 담양은 대나무로 유명하고, 하늘로 곧 게 뻗은 대마무의 기상만큼이나 많은 선비들을 배출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시인묵객들이 태어 나고 찾아와 가사문학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문 학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창평향교의 부흥과 많은 후학을 길러낸 고직당 박영철 선생이 있어 그의고향이기도 한 금단마 을은 마을주변에 금단풍 나무가 무성하여 금단 동이라불리어오고있다. 마을의형성과입촌과정 입촌이후세계와세거지변천 대구광역시 수성구 범물동의 당산나무 아래 비석이 자리하고 있 다. 밀성박씨 행산공 후 후성(厚成)의 부인 성주배씨의 열행(烈行) 을 기리기 위한 효열비이다.후성(厚成)공은 행산공의 16대손이다. 10대조는 사미(四美)인데 진사다.한훤당 김굉필,일두 정여창 등과 더불어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으로 학문과 덕행으로 통례원 인의에 제수되고, 또 명경(明經)으로 봉교(奉敎)와 홍문관 교리에 제수되 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슬하에 숙지, 숙근, 언계 삼형제를 두었는 데둘째숙근의후예이다. 성주배씨는 1764년(영조40)에 태어나 1788(정조12)에 세상을 떠 날 때가지 24년의 짧은 삶에는 지극한 효부(孝婦)이자 열녀(烈女) 로써후인들에게기록된다. 배씨는 박후성의 부인으로 남편이 이름 모를 병에 걸려 자리에 눕 게 되자 백방으로 약을 구하고 치료를 하였으나 병세는 호전될 기미 가 없어 보다 못한 부인은 자기의 손가 락을 깨물어 흐르는 선혈(鮮 血)을 남편의 입안으로 떨어트려 원기를 회복시켰으나 결국 4일만 에 세 상 을 떠 나 고 말 았 다 . 남편이 죽은 뒤 3년동안 시묘(侍墓)를 하였고, 죽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워하며 80세가 넘은 시어머님을 극진한 효성으로 봉양하다 가 시모가 돌아가시자 역시 3년 동안 시묘를 하였다. 그리고 시묘를 마친 해 남편의 제삿날에 제사를 지낸 뒤 스스로 남편을 뒤를 따랐 다. 이 같은 부인의 열행(烈行)이 조정에 전해져 정려가 내려지고 1 910년(융희4)4월 후손들이 비를 세우고 느티나무를 심어 제(祭)를 올렸다. 그후 숲이 울창하게 되어 문중에서 동내 당산목(堂山木)으로 풍 년농사와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당산제를 병합(竝合)하여 봉행해 오고있다. /자료제공박무흠전(前)신덕왕릉참봉 밀성박씨행산공후후성(厚成)의부인성 주배씨 효열부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