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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10월31일 일요일 4 (제178호) 기 획 △박병인(인천시 연수구) △박연희 박해용(강원 동해시) △박인근(충북 청주시) △박봉순(충남 서천시) △박 희중(세종시) △박창균(경북 영천시) △박종백(경북 포항시) △ 박상철(경 북 예천군) △박복로 박의묵(경북 청 도군) △박종욱(경북 청송군) △박진 하(대구 수성구) △박만순(부산 연제 구) △박영덕(부산 수영구) △박문호 박성국, 박재헌(경남 창원시) △박래 수(경남 진주시) △박정영(경남 밀양 시) △박문갑(경남 통영시) △박갑영 (경남 산청군) △박명호(경남 의령 군) △박태식(경남 사천군) △박철환 (전남 장흥군) △박종인(전남 광양 시) △박래호(전남 장성군) △박형상 (전남 고흥군) △박영희(제주시 애월 읍)△박순원(제주한림읍) ◎서울 △박완규(동작구) △박봉재 (양천구) △박홍득(중구) △박석휘 (송파구) △박종우(서초구) △박종태 (성북구)△박종모(광진구) ◎경기 △박진원(인천시) △박승 현. 면천박씨대종회(용인시) △박영 운 박무관 박계순 박영옥(안산시) △ 박수영(양평군) ◎강원 △박영화(강릉시) △박성갑 (원주시) ◎충북 △박문희. 박일순. 박병영 (청주시) ◎충남 △박기홍 박선복 충주박씨 대종회(대전시) △박석순(세종시) △ 박도신(천안시) △박형원(당진시) △ 박완용(부여군)△박종인(서천군) ◎경북 △박귀훈 박정래(포항시) △박영두(안동시) △박재양 박양한 (경주시) △박헌규 박희준 박욱현 박 재성(청도군) △박상홍(고령군) △박 영탁 박일동(영양군) △박현식 박종 국(청송군) △박원환(예천군)△박정 노(의성군) ◎경남 △박희정 박씨밀양시종친회 박재숙 박채호(밀양시) △박종해. 박 철곤(창원시) △박영진 박효근 박영 진(김해시) △박성근(양산시) △박영 길. 박채회(진주시) △박원주 박태영 (창녕군)△박종하박주행(산청군) ◎대구 △박일섭 박홍곤(동구) △ 박무흠 박문환(수성구) △박정열 도 태기박동춘(달서구)△박형준(남구) ◎울산 △박경환(남구) ◎부산 △박차현(영도구) △박사자 (해운대구) △박호근(동래구) △박원 성(기장군) ◎전북 △박대규(전주시) △정읍시 박씨종친회(정읍시) ◎전남 △박해동(화순군) △박재원 (장성군) ◎광주 △박길섭(서구) ◎제주 △박봉찬(제주시) △박정수 (서귀포시)△박지홍(애월읍) △충주박씨 문간공파 △경주박씨 진도종중 △수산사보존회 △박남현 前남해왕릉참봉 ※신우수출포장 박재한 대표(본보 이사)님이백만원후원해주셨습니다. ※충주박씨 강릉공파문중(11名) 입 금해주셨습니다. 한빛신문은성손여러분이함께 만들어가는소중한자산입니다 한빛신문은2007년창간이후선조님의행장과종중의약사집성촌,본관별세거지변천사등 수 많은자료를기록으로남기는방대한 작업을하고 있는‘성손모두가함께만들어가는종보’입 니 다.그역할을충실히하면서선조님의현창사업과후손들에게물려줄박문(朴門)의뿌리를연 구 하고다듬어데이터베이스화하는데앞장서겠습니다. 한빛신문임직원일 동 뱚뱚제보및구독신청안내:053-588-7300,070-4250-0078 ▶fax053-581-0067▶e-mail:parkss1012@han mail.net 뱚※성손여러분이납부하여주신구독료는신문발행에큰도움이됩니다. 월3,300원으로종보를함께만들어가는주인이되어주세요. 구독료를가까운금융기관에서자동이체(월3,300원)하여주세요 뱚뱚뱛구독료자동이체계좌453013-55-000691농협한빛신문 [9월21일에서10월20일입금고객명단] 뱚▶자동이체등록해주신분 뱜▶지로납부및송금하여주신분 ※2021년 7월 2일자 E-우리은행 한빛신문구 독료로 입금해주신 고객님과 2021년 4월 13 일자 PC신한은행 3100로 입금해주신 고객 님께서는연락 주시면감사하겠습니다. TEL: (053)588-7300 뱜▶후원하여주신분 일심헌 박언배(一心軒 朴堰培 1604~1632)는 고구려 왕산 악, 신라의 우륵과 함께 우리나라 3대악성(樂聖)으로 추앙받 고 있는 난계 박연(蘭溪 朴堧 1378~1458) 선생의 5대손이고, 고조의 휘는 맹우(孟愚)인데 강서현령(江西縣令)과 돈영부 도정(敦寧府都正)이고, 단종절신 계우(季愚)는 막내동생이 다. 증조부 휘는 곤(坤)으로 풍기군수(豊其郡守), 조부는 휘 경흥(卿興)으로 교수관(敎授官)으로 수차례 불렀으나 끝내 불취하고 후학양성에 매진하고 세덕(世德)의 가풍(家風)진 작에 힘썼다. 아버지의 휘는 윤수(允守), 어머니는 완산이씨 이다. 공은 선조37년(甲辰, 1604) 3월 10일 전남 곡성군 입면 궁동마을에서 태어났는데 궁동마을 입향조는 퇴락재(退樂 齋)박경흥(朴卿興)선생이다. 븮馬革塗尸還葬耳(마혁과시환장이)븯 “사나이란 전장에 나 가 싸우다 죽어 말가죽에 싸여 돌아오는 것이 모름직이 진정 한 사나이다.” 이는 일심헌 박언배장군이 무인(武人)으로써 기상을펴기위해항상애송했던시귀절이었다고전한다. 1627년 후금(後金: 청나라)이 쳐들어와(丁卯胡亂) 나라가 풍전등화의경각에놓이자의병을모집하였다. 당시 조정의 사정은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광해군 을 몰아내고 조정의 실권을 잡은 서인들은 광해군 때의 대외 정책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후금과의 관계를 끊는 한편, 모문 룡을지원하는등친명배금정책을추진하였다. 이에 후금은 배후로부터 위협을 받게 되고, 명나라에 이어 조선과도 경제 교류의 길이 막혀 극심한 물자 부족에 허덕이 게 되었다. 때문에 후금은 무력적인 수단으로 이를 타개할 기 회를노렸다. 한편 조선에서는 인조반정 뒤,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 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그 잔당이 후금과 내통하게 되었 다. 이에 즉위 전부터 조선에 대한 화친 방침에 반대, 주전론 을 주장해왔던 청나라 태종은 더욱 침략의 뜻을 굳혀 1627년 1월아민(阿敏)에게3만의병력으로조선을침공하게하였다.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점령한 후금군의 주력 부대는 용천· 선천을 거쳐 안주성 방면으로 남하하고, 일부 병력은 가도의 모문룡을 공격하였다. 조선군은 곽산의 능한산성(凌漢山城) 을 비롯, 곳곳에서 후금군을 저지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가도 의모문룡도신미도(身彌島)로패주하였다. 후금군의 침입이 조정에 알려지자 인조는 장만(張晩)을 도 체찰사로 삼아 적을 막게 하고,여러 신하를 각지에 파견해 근 군(勤軍)을 모집하였다. 그 동안 후금군은 남진을 계속, 안주 성을 점령하고 다시 평양을 거쳐 황주까지 진출하였다. 그리 고평산에포진했던장만은개성으로후퇴하였다. 전세가 극도로 불리하자 김상용(金尙容)이 유도대장(留都 大將)이 되어 서울을 지키고,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전주로 남하하였다.이사이인조는전란을피해강화도로들어갔다. 한편,각지에서는의병이일어나후금군의배후를공격하거 나군량을조달하는등분전하였다. 일심헌공 또한 의병장으로써 당시 전라감사였던 사계 김장 생(沙溪 金長生)의 막하(幕下)로 들어가 청주(淸州) 및 황주 (黃州)로 진격,수 많은 접전을 벌려 오랑캐를 토벌했다.그러 나 1632년 안주싸움에서 명나라 장수 모승록(牟承祿)과 연합 전선을 펼쳐 적장 유흥치(劉興治)를 토벌하다 3월 17일 순절 했다.한편,부인완산이씨(完山李氏)는 전장에서순절했기에 초혼을 불러 장례를 치르는 초혼반장(招魂返葬)을 한 후,2살 난 아들(박일립 1629~1696)을 시숙들에게 부탁하고 자결, 남 편뒤를따른다. 옥과읍지(玉果邑誌)와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의 기록에 따르면 완산이씨의 유서엔 “지아비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받 쳤거늘 나는 누구를 위해 살리오. 살아 지아비의 충성된 뜻을 더럽히느니 지아비의 뒤를 따라 가는 것이 소원이로소이다” 라고적혀있다. 그러나 충신의 죽음에 대한 포상을 소원했다. 이에 정조 12 년 무신(1788)4월 4일(병신)정조임금은 각 해사(該司)에 상 언(上言) 166도(度)를 판하(判下)하였는데 당시 일심헌공에 대한기록이전해진다. “옥과(玉果)의 유학 박춘계(朴春桂) 등의 상언에, ‘고조인 박언배(朴堰培)는 임신년(1632, 인조10) 북로(北虜)의 변란 때포위된안주(安州)로용감히달려가싸우다가목숨을바쳤 고 그 처(妻)는 남편을 위하여 절개를 바쳤으니, 정포(旌褒) 의 은전을 베풀어 주소서.’ 하였습니다. 오래 전에 있었던 일 이어서 그대로 믿기 어려우니, 본도로 하여금 사실을 조사하 여 장문하게 한 뒤 품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여, 그대 로 따 랐 다 . 그리고후학들은일심헌과완산이씨에대한충열에대한포 상을 꾸준히 조정에 전달하였고, 이러한 사연은 급기야 1805 년 옥과현감 윤정진과 성사묵 어사, 신응조 판서 등이 기록하 고 도내 유림들이 충절과 순절을 조정에 품고(稟告)했다. 이 를 받아 든 순조대왕은 “이는 기울어 가는 윤강(倫綱)을 붙들 고, 백세(百世)에 교화(敎化)를 이룩한 것이다”며 동몽교관 (童蒙敎官)과 선무동종3등(宣武東從三等)을 추증하고 충열 문(忠烈門)이라는정려(旌閭)를내려주었다. 당시조선왕조실록은다음과같이기록하여전하고있다. 뷺순조 5년 을축(1805)6월 9일(신유)고(故)사인(士人)박 언배(朴堰培)에게는 증직(贈職)하는 은전을, 그의 처 이씨 (李氏)에게는정려(旌閭)하는은전을시행하라고명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작년 9월 전라도의 유학(幼學) 김종근 (金宗根)등이 옥과(玉果)의 고 사인 박언배의 충절(忠節)및 그의처이씨의열행(烈行)에대해증직하고정려하는은전을 청하는일로상언(上言)을올렸습니다.이것으로 인해본조에 서 다시 도신으로 하여금 자세히 탐문하여 보고하게 하고 보 고를 받은 뒤에 상께 여쭈어 처리하겠다는 내용으로 복계(覆 啓)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방금 전라 감사 심상규(沈象奎) 가 보낸 공문을 보니 ‘박언배는 바로 판서 박연(朴堧)의 5세 손입니다. 천계(天啓) 정묘년(1627, 인조5) 강홍립(姜弘立) 이 침입했을 때 양호 호소사(兩湖號召使)인 김장생(金長生) 이 의병을 불러 모으자 박언배는 고을의 병사들을 모집하여 황주(黃州)로 나아가 많은 공을 세웠습니다. 임신년(1632)에 는 또 안주(安州)의 전투에 나아가 노추(虜酋) 유흥치(劉興 治)와 싸우다 끝내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의 처 이씨는 그 소식을 듣고 초혼(招魂)하여 장례를 치른 다음 두 살짜리 젖먹이를 아이의 숙부에게 부탁하고 그대로 스스로 목을 맸 습니다. 사적(事蹟)이 대략 읍지(邑誌) 및 그의 아들인 박일 립(朴鎰 몬)이 올린 의송(議送)의 제사(題辭)에 보이고 그 이 후 수백 년 동안 공의(公議)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라고 하 였습니다. 이미 증명할 만한 실제 사적이 있으니 박언배에게 는 증직하는 은전을 시행하고 그의 처 이씨에게는 정려하는 은전을 시행하는 것이 풍교(風敎)를 수립하고 절개를 장려하 는 정사에 맞을 듯합니다만 은전에 관계된 일이니 상께서 재 결하는것이어떻겠습니까?”뷻하여,그대로따랐다.』 옛 사 적 (史 籍 ) 들 을 들 추 어 볼 때 , 한 가 문 의 부 부 가 충 ( 忠 ) 과 열(烈)을함께한 사례를 들어 국가로부터 사우(祠宇)을 하 사받은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러기에 충열문에 대한 후손 들의긍지는대단하다.1969년 전라남도 제51호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공의 휘는 계우(季愚)이니 문헌 난계선생의 제삼자이다.유 소시절 가정지학을 전수받아 충효지도에 뜻을 세웠다. -중략 - 공의 아담한 지조와 늠름한 절개를 가히 추상할 수 있다. 이 러한 지조로 세종 문종조에 출사하여 경악지중에 출입하면서 성삼문 절사 등 사육신들과 도의지교를 맺었다. 단종조에 집 현전 한림이 되어 고명을 받은 동지들과 입조하여 정의를 위 하여생사를더불어할것을맹서하였다. 계유정란에 국문을 당하고 제충장(弟忠蔣) 허정간(許貞 簡) 제인(諸人)과 더불어 성인(成仁)하기를 결의하였다. 투 옥된 채 해를 거듭하였으되 추호(秋毫)도 심경(心境)에 동요 (動搖)가 없고 인순노친(人旬老親)의 사건 가담 설을 끝내 부 인함으로써 자신은 순절하였으되 노친(아버지 박연)만은 죽 음에서구하였다. 성상 십오년 신해 이월 일일에 서적이 명백하여져서 이조 참판에증직되고장릉정단에삼십절사와함께배식되었다. 공의 충효가 모두 밝혀졌다.신자의 탁이한 절행이 있다.하 여도 군부의 표창이 없으면 그 실지가 어찌 알려지고 그 행실 이 어찌 추앙될 수 있겠는가 공의 충절이 만액 성조의 은전이 없었던들 얼마가지 않아 민몰되고 후세에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오호라공의부자는강상을가구에남겼으니 아버지는효친 (孝親)하고 아들은 충군으로 살신성인하였으니 군자의 충효 를아버지로부터아들이전수받아후일에빛나게하였다. 궁동(弓洞)마을은 밀양박씨(密陽朴氏) 난계 박연 선생 후 손의 자자일촌(子子一村)으로, 입향조(入鄕祖) 박경흥의 호 (號)는퇴락재(退樂齋)또는월오헌(月梧軒)이다. 박경흥은 고구려 왕산악, 신라의 우륵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악성(樂聖)으로 추앙받고 있는 난계 박연(蘭溪 朴堧 1378~14 58)의증손자요,풍기군수박곤(朴坤)의아들이다. 고려조에 이어 조선조에 걸쳐 수많은 문과급제자을 배출한 한양(漢陽)의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부족함이 없던 밀양 박씨 가문의 박경흥(朴卿興)이 멀고 먼 옥과현(玉果懸)을 찾 아 내려 온 까닭은 1450년대 중반에 휘몰아쳤던 단종사화(端 宗士禍 1453~1456)로 불어닥친 멸문지화(滅門之禍)을 피하 기위해서였다. 즉, 난계선생의 세째아들로 집현전 한림학사(翰林學士)였 던 박계우(朴季愚)가 1454년(단종 2년) 성삼문, 박팽년,하위 지,유성원,이개,유응부 등의 사육신(死六臣)과 단종을 축출 하고 왕위에 오르려는 수양대군을 끝까지 반대 제거하려하다 발각돼 한날 한시에 순절 당하자 난계선생에게 미치는 여화 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3조(태종, 세종, 문종)를 모신 원로 대신이라하여간신이형(刑)만은면하게되었지만그의후손 은 가솔들을 이끌고 전국각지로 흩어져 후일을 기약해야만 했다. 박경흥은 현 마을에 초당을 짓고 살며 세상사를 뜬구름 같 이 보고, 부귀를 초개와 같이 여기며 경서(經書)만을 읽었다 고 전한다. 1495년에는 조정으로부터 교수관(敎授官)에 누천 (累薦)되었으나역시거절하고취임치않았다. 당시 옥과현의 한적한 지역으로 이거(移居)를 결심한 이면 에는 옥과의 진산인 ‘설산(雪山)아래 10리 근방에 마음 편히 쉴 곳이 있다’는 풍수설(玉果雪山下 十里許 避難之處)에 따 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살펴볼 때 궁동마을이 설촌된 시기는 약 550년 전후가 아닌가 유추된다. 일설에는 퇴락재가 입촌할 당시 정씨들이 거주했으나 언젠가 다른곳으로이거해갔다고전해온다. 마을에는 난계 박연 선생의 영정을 모신 오봉사와 일심헌 박언배와완산이씨를기리는정려충열문이있다. 충렬문바로윗쪽에는근세에한학자요,교육자로써학명을 떨친 우계 박준호(又溪 朴埈浩 1890~1959)와 박래춘(朴來春) 등이 선대인 난계 박연을 추모하기 위해 영당 건립을 추진하 고, 이어 박래영(박준호의 子), 박준하(朴準夏)씨 등 후손들 이 서울국립국악원에서 난계 부부의 영정을 모셔와 1967년 오봉사(梧峰祠)를 준공했다.매년 음력 3월 13일 지역 유림들 의 주도로 제향을 모시고 있다. 현재 충열문과 오봉사는 각처 의 향우들을 비롯한 지역내 학생들의 문화유적 답사지로써 매우각광받고있다. 궁동마을의 주변에는 박씨문중에서 선대들을 모신 풍수지 리적으로 널리 알려진 3혈이 있는데, ‘시향터’의 노서하전혈 (老鼠下田穴), 마을 앞 한질건네(큰길 건너편이라는 뜻의 지 명)13호국도곁의와우혈(臥牛穴),마을 뒤편의연소혈(燕巢 穴) 등이다. 마을앞 당산에는 느티나무, 왕버들 등 300~400년 의 수령을 자랑하는 노거수가 여름철 짙은 녹음을 드리우며, 500m쯤 떨어진 마을 진입도로변 ‘새모실’이라 불리는 곳에는 높 이 2 m의 입 석 (立 石 ) 이 하 나 서 있 어 마 을 의 수 세 를 지 키 고 있다. /글븡사진=박상섭 편집국장(parkss1012@hanmail.net) 뱚효열부열전 일심헌박언배(一心軒朴堰培)와부인완산이 씨(完山李氏)旌閭충열문(忠烈門) 충열문-전남곡성군입면삼오궁동길101-6(전라남도유형문화재제51호) 궁동마을전경,145 0년경박경흥이 영동에서입향집성촌을이루고있다. 인(仁)과 의(義)는 오상(五常)의 강(綱)이요 충효 (忠孝)는 백행(百行)의 근본(根本)이다 자식이 되 어서는 진심할 바는 효를 실천하고, 신하는 임금 을 섬기되 충심을 다해야 한다. 전남 곡성군 입면 궁동마을앞에있는충열문은충과효를실천한본 보기가 되고 있다. 그리고 일심헌공의충절은 5대 조 난계 박연선생과 단종절신으로 사육신에 비유 되는 종고조부 박계우의충절등세덕이 아닌가 싶 다.이에박계우의행장과태어난궁동마을을함께 소개해본다. 일심헌박언배(一心軒朴堰培) 한림공박계우행장 일심헌공이태어난궁동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