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page
2021년5월31일 월요일 4 (제173호) 관향조 종친회·기획 노령산맥의내룡이뻗혀임곡마을이되었는데/ 명문인 죽산박씨가 살 곳을 정하여 번창하여/ 백 우산 아래 명당터전에는/ 재실을 이룩하여 제향 을 받들고 있네/ 고색창연한 들보와 서까래는 위 엄이 있고/처마 끝은 조상님들의 영혼이 깃든 듯 빛나네/ 기복이 많은 운세가 수없이 돌고 돌았으 니/ 조상님들 추모하며 우러러보니 감회 어린 눈 물이 나네[원문 - -感仰永慕齋-蘆嶺來龍林谷鄕 (노령내룡임곡향)/ 名門竹朴居尊昌(명문죽박거 전창)/ 白牛山下明堂處(백우산하명당처)/ 齋室 建成奉祭享(재실건성봉제향)/ 古色蒼然梁 갠威 (고색창연양각위)/ 軒端留宿祖靈光(헌단유숙조 령광)/ 消長運氣流轉數(소장운기유전수)/ 追遠 仰瞻感淚慷(추원앙첨감루강)] 前국회의원 박형규 현종이 방조(傍祖) 문중의 재실을 찾아 소감을 적은 것으로 영모재는 500여 년 전 정착하여 지역의 토반으로 성장하면서 대 대손손 선조의 음덕을 기려온 터전으로 주변에 선조께서 많은 시인묵객과 함께 시문을 읊었던 가 학 정 이 있 어 이 를 뒷 받 침 해 주 고 있 어 찾 아 가 본다. 영모재는 1612년 호남 낙남조 함평군수 휘 승 양(承陽)의 5대순 휘 종(琮, 丹邱子公)께서 처음 신축하여 정사(精舍, 학문을 가르치려고 마련한 집)로 사용하였다. 당시 단구자공의 백형 죽림처 사공이 지은 가학정과 성성재와 함께 지역의 뜻 있는 선비들이 자주 찾는 절의를 지키고 학문을 연마하는 곳으로 유명을 떨치기도 했다.이후 178 1년 불행하게도 타인 소유로 되어 50여년이 지난 1831년에 종원들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매수하여 재숙소로사용되었다. 1905년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이후, 1912년부터 8년간 일본 군의 병참(兵站) 및 주재소(駐在所)로 사용되어 오다 광복과 함께 문중으로 환원되어 막상 재실 로 사용하기에는 왜놈들의 간악한 행의로 인해 신성(神聖)하지 못하고 또한 노후화 되어 6칸 ‘ ㄱ’자 집을 4칸으로 1921년 중건하여 재실로 사용 했다. 그러나 영모재의 역사는 평탄치만 못하여 1970 년 12월 불의의 화재로 인하여 원래모양을 보존 하기 어려워 소실부분만 보수하게 되었으나 이 또한 세월 속에 버티지 목하고 퇴락하여 2015년 전면적인 보수와 담장을 허물고 새롭게 축조(築 造)하고, 소실된 영모재(永慕齋) 편액(扁額)을 방후손 형규 전(前) 국회의원(문정공 23세손)의 글씨로새롭게걸어지금에이른다. 영모재는 전면 4칸 측면3간의 팔작지붕 와가로 양쪽에 방을 두고 중간 2칸은 대청으로 제향을 받 들도록되었으며,측면1칸은툇마루이다. 영모재 입구는 원임곡마을 안길로서 많은 사람 들이 오가는 곳으로 조경석과 관상수와 꽃나무를 심어 공원화하였으며, 대문과 맞닿아 있는 마을 경로당을 찾은 노인들의 쉼터로 활용되고 있어 5 00여년 집성촌을 이룬 토호성씨로 지역주민과 소 통하며 더불어 살아가고 있어 새로운 종중문화를 형성하고있기도한다. 죽산박씨 문정공파는 죽산박씨의 관향인 용인 시 백암면 옥산리(죽산군 외산면 옥산리에서 191 4년 행정구역개편) 일대에 거주하며 고려시대와 조선초 개경과 한양에서 누대에 걸쳐 청관(淸官) 으로세거했다. 문정공은 고려사 편수에 참여하고 형조와 이조 판서를 역임한 휘 원정(元貞)으로 자(字)는 지성 (之成),호(號)는 만은(晩隱)이다. 1414년에 태어났는데 재주가 뛰어나고 학문이 정교하고 치밀하여 도덕문장으로 이름이 높았으 며, 형제간에 우애가 깊고 효성이 뛰어나 선고이 신 연흥군(휘 고)께서 두 차례나 외지로 귀향을 갔 을 때 형 문 헌 공 (휘 원 형 )과 함 께 따 라 가 조 석 으로 곁에서 모시며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하니 그곳 사람들이 그 효성을 칭송하지 않은 이가 없 었다. 1441년 문과에 급제하여 정랑과 수차 요직을 거쳐 청관 현직을 지내고 춘추관 기사관을 겸직 하시어 왕명을 받들어 고려사를 편수하면서 가문 이 쇠함을 탄식하시어 시를 지어 자손에게 경계 하였다.그 시에 이르되 븮우리 조상은 신라의 진골 로 연성부를 식향으로 하사 받았노라./삼한에 이 름난 갑족으로서 대대로 벼슬하여 가문이 빛났노 라./그러다가 문운(門運)이 뒤집히니 운수런가./ 그러나 운수의 부침(浮沈)이 어찌 일상사랴./ 여 러 자손은 모름지기 학업에 힘써 충효가 문광공 을 이를지어다.븯 여기에 문광공(文匡公)은 문정 공의 5대조로 휘는 전지(全之)로 외교(外交)와 정치이론에 밝아 원(元)나라에까지 명성을 떨치 고 충선왕(忠宣王)이 복위(復位)하자 연흥군(延 興君)에 봉해지고 시호는 문광(文匡)으로 18세 에 과거에 급제하여 문하주서에 이르러, 1279년 원나라에서 고관대작들의 자녀들을 뽑아 입시하 였는데 거기에 뽑혀 중국의 이름난 선비들과 사 귀면서 고금의 사건과 산천(山川)·풍토(風土)등 을 토론하며 익혔다. 원나라 황제가 정동중서성 (征東中書省) 조마유학교수(照磨儒學敎授)를 제수하였다. 고려에 돌아와서는 주요요직을 두루 거쳐 중대광 첨의찬성사 우문관 대제학 감춘추관 사 판선을 역임하고, 삼중대광 수첨의정승 우문 관대제학 감춘추관사 상호군에 제수하였으나 사 양했다. 문정공은 1464년(세조10) 겨울에 사은사로 중 국에 가 사은사로서 체통을 아주 훌륭히 하여 황 제로부터 상하홀과 포도연벼루, 영무배 술잔을 하사받고 총애를 한몸에 받았으며, 본국에 돌아 와서는 세자우빈객으로 승진시키고 형조판서에 제수하였다가 다시 이조판서로 전보하여 정헌대 부의벼슬을더하였다. 문정공은 3대의 조정을 걸쳐 섬기면서 청백하 고 근신하며 스스로의 분수를 잘 지켰다. 그리고 한번 중국에 사신으로 가 이름을 떨쳤다. 겉으로 는 비록 엄격하고 씩씩하였으나 마음씨는 실로 너그럽고 활달하시어 흠모하는 사람이 많았다. 항상 충효와 청백으로써 자손을 훈계하시어 당세 의법가(法家)라고들하였다한다. 문정공은 슬하에 세 아들을 두었다. 장남 휘 승 양(承陽)은 통훈대부 함평현감을 역임하였고,차 남 휘 안수(安壽)는 선전관, 셋째 휘 안복(安福) 은 좌랑(佐郞)이다. 장남 함평현감 휘 승양(承 陽)公이 낙남조이다.후손들이 영모재가 있는 원 임곡에 거주하게 된 문헌근거인 족보 기록에 의 하면 함평현감공의 손자(휘 배근)때부터라고 추 정되는데,현감공의 아들 휘 한곤의 면주(面註:책 에 서 각 면 의 제 목 따 위 를 통 틀 어 이 르 는 말 )에 ‘함평현감 재임시에 경향을 왕래하던 중 나주 박 산이 좋은 터임을 알고 장자 배근을 주거케 하고 차자 양근은 원임곡에 거주케 하였다.’라는 기록 이 이를 입증하고 있어 입향 520여년이다. 임곡문중은 충절(忠節)의 가문으로 대표한다. 낙남조 함평현감(휘 승양)공의 아들 한곤(漢昆) 은 현감, 장손자 배근(培根)은 문과 첨지, 차손자 양근(養根)은 원종공신으로 어모장군충무위부 사직을 역임했다. 아들 린( 멩)은 1513년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에 있을 때 을사사화를 당 하여 경성으로부터 광주로 내려왔는데 광주 임곡 에서여생을즐겼다. 휘 승양의 5대손(린의 손자)휘 경(璟,1559~16 33)은 사계 김장생 선생 문하에서 동생 휘 종(琮) 과 학문을 연마하고 우애가 돈독하여 족숙인 좌 상 휘 홍구(弘 )와 영추 기자헌(領樞 奇自獻) 이 관직에 나아갈 것을 권하였으나 나가지 않았 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울분을 참지 못하 여 함재(涵齋) 기효증(奇孝曾)과 같이 각 고을에 서 의곡을 모아 장성 의병청으로 가서 전략을 세 워 의견을 진술하니 여러 의사들이 공을 기효증 의 종사관으로 추천하였다. 그리고 의곡 수 천석 을 죽음을 무릎 쓰고 바다를 통하여 의주 행재소 까지 운반하여 군량을 공급하였다. 이에 선조는 그 충절을 장하게 여겨 평시서직장(平時署直腸) 의 벼슬을 제수 하는 등 군량미 모곡(耗穀)에 많 은 공적을 남긴 당시의 충신이다. 이후 조정에서 다시 불러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이에 걸 맞는 높 은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고 강 호에서 살기를 원하는 퇴로(退老)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에 이를 가상히 여긴 선조임금은 그에 게 죽림처사(竹林處士)라는 아호(雅號)와 함께 궤장( 누杖, 안석과 지팡이)을 내려 그 지절을 포 상하였다. 광주 임곡에 퇴거하여 성성재(惺惺齋)와 가학 정을 짓고 거처하며 시례(詩禮)를 즐기며 특히 송죽의 절개를 사랑하며 세상근심을 잊고 지내면 서시를지어제손(諸孫)들을교도하였다. 죽림처사휘경(璟)의아들용회(휘用晦)와손 자 진빈(휘 晉彬) 또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종군 또는 거병하여 혁혁한 공을 세워 충의의 가 문으로전해지고있다. 죽림처사공의아우인종(琮)의호는단구자(丹 丘子)인데 문장과 필법이 뛰어나 1615년에 사마 시에 오르고, 1627년 정묘호란에 사계 김 선생과 같이 거의(擧義)하였으며, 1636년 병자호란에 도 내 동지들과 창의하여 참전( 핫戰)하였다. 공의 손 자 진 빈 (晋 彬 )의 호 는 포 허 자 (抱 虛 子 )인 데 종 조 단구공(丹丘公)을 따라 의병을 일으켰다는 사 실이 양호거의록(兩湖擧義錄)과 호남창의록에 기재되어전해진다. 영모재가 있는 원임곡에는 성성재, 가학정, 종 택, 함평현감공단소, 종중묘원, 후손들의 공적비 등이 즐비하다. 이중에서 가학정과 종중묘원을 소개해본다. ▲ 가학정 ((駕鶴亭) - 영 모 재 에 서 바 라 보 이 는 광 주 광 역 시 광산구 임곡 동 사호마을 용진산 8부 능선에 성성 재와 가학정 이 있다. 이곳은 영명재를 지은 단구자공(휘 종) 의 백형 죽림처사공(휘 경)이 임진왜란 이후 포 상을 사양하고 낙향하여 시례(詩禮)를 즐기며 특 히 송죽의 절개를 사랑하며 세상근심을 잊고 지 내면서 시를 지어 제손(諸孫)들을 교도하였던 곳 이기도 하다. 가학정(駕鶴亭)은 죽림처사 박경의 높은 지절(志節)을 포상하기 위해 1601년 국고금 으로 지어졌다. 가학(駕鶴)이라는 말은 신선이 학을 타고 노닌다는 뜻으로 그의 만년 수양을 위 해 지은 것으로 이곳의 경치를 살펴보면 황룡강 이 굽이쳐 정자 밑을 흐르고 정자에 오르는 길목 에는 층암절벽이 솟아있어 소금강을 방불케 하고 수림이 울창하여 학덕이 높은 선비가 시서를 벗 삼고 살기에는 더 없이 호적(好適)한 곳이다. 성 성재는 한때 불사(佛事)를 일으켜왔으나 지금은 형태만남아있다. ▲종중묘원 -임곡 문중 선산은 입향 이후 원임 곡을 중심으로 하여 광주 전남·북에 세거지를 정 해 떠나면서 각처에 선산을 두고 묘역을 관리하 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2008년에 ‘자연장(수목 장, 화목장, 잔디장)’을 도입하여 권장하면서 문 중도 각처에 산재해 있는 묘소를 원임곡 선영으 로이장을추진했다. 좁은 국토면적에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의 땅을 차지해서는 안 된다.’는 뜻에서 자연회귀의 섭리 에 따라 잔디묘원을 조성하였다. 이 묘원은 2017 년 착공하여 2018년 완공되었으며 현재 400여기 의 유해가 안장되었다. 그리고 남은 잔디장지는 살아있는 후손들의 묘지로 하여 향후 500여 년 동 안 안치(安置) 될 수 있는 장지로 임곡문중의 구 심점이되기에충분하다. /박상섭 편집국장(parkss1012@hanmail.net) 뱚재실탐방 죽산박씨문정공파임곡문중의영모재 (永慕齋) 광주광역시광산구원임곡길34(임곡동) 원임곡마을전경. 뱚건립연대와규모 영모재 뱚임곡문중의형성 2015년9월중수를마치고당시규현회장이 중수에큰역할 을해온 봉용 총무이사(右)에게감사패를전달하고있다. 뱚충절의가문으로승화(昇華) 뱚영모재주변유적 가학정. 제향일에후손이 묘역을찾아성묘를하고있다.(사진박동 면 이 사) □자동이체등록해주신분 △박병인(인천시 연수구) △박연 희,박해용(강원 동해시)△박인근(충 북 청주시)△박봉순(충남 서천시)△ 박창균(경북 영천시) △박상철(경북 예천군) △박진하(대구 수성구) △박 만순(부산 연제구) △박영덕(부산 수 영구) △박문호, 박성국, 박재헌(경남 창원시) △박래수(경남 진 주시) △박 문갑(경남 통영시) △박갑영(경남 산 청군) △박명호(경남 의령군) △박태 식(경남 사천군) △박철환(전남 장흥 군) △박종인(전남 광양시) △박래호 (전남 장성군) △박영희(제주시 애월 읍)△박순원(제주한림읍) □지로납부및송금하여주신분 ◎ 서 울 △박재우(성동구)△박희석 (광진구) △박동훈(종로구) △박노정 (강서구) △박재호. 박신일(중랑구) △박규홍(송파구) △박재창(영등포 구)△박종돌(관악구) ◎ 경 기 △박상윤(고양시) △박재 규(부천시) △박기열(남양주시) △박 백준(안양시) △박종송(화성시) △박 수용(수원시) △박종수, 박용상(양평 군) ◎강원 △박정현(원주시) △박재 두,박철규,박동석(동해시)△박흥원. 박태근(강릉시)△박병승(평창군) ◎충북 △박재훈. 박호섭(청주시) △박상범(영동군) △박 용(진천군) △박영순(증평군)△박봉석(청원군) ◎충남 △박기영(공주시) △박중철 (서산시) △박종량(논산시) △박철규 (세종시)△박정진(서천군) ◎경북 △박한규. 박문환. 박한철 (안동시) △박식열(상주시) △박기 호(문경시) △박영환(영천시) △박주 식(영주시) △박규환(경산시) △박윤 철, 박해영(포항시) △박동준(경주 시) △박위출, 박후관, 박희범, 박희 상, 박순식, 박남현, 박순은, 박병구, 박진흠(청도군) △박영환. 박태근(의 성군)△박동수(영덕군) ◎경남 △박영배. 박동술(밀양시) △박용부(김해시) △박윤술. 박용섭 (창원시) △박채은(양산시) △박현 옥, 박중희, 박홍종(남해군) △박영덕 (함안군) △박성서(함양군) △박진규 (고성군) △박인태(산청군) △박현제 (합천군) ◎대구 △박응명(동구) △박종수. 박범식, 박운식(수성구) △박태복, 박 만화(북구) △박흥병(달서구) △박정 식(남구)△박병훈(중구) ◎울산 △박주익(울산) △박만석, 박상홍(울주군) ◎부산 △박치환(해운대구) △박씨 종친회부산본부, 박주석(동구) △박 문상(영도구) △박래동(북구) △박병 식. 박남수(수영구) △박쌍덕. 박영철 (금정구) △박상희(중구) △박종대 (부산진 구) △박삼주, 박재우(연제 구) ◎전북 △박영근(익산시) △박건식 (남원시) △박순정(전주시) △박기옥 (김제시)△박노상(고창군) ◎전남 △박암기(나주시) △박정옥 (여수시) △박재계(고창군) △박진 규, 박종성, 박채주(고흥군) △박인복 (해남군) △박진수(강진군) △박광식 (담양군) △박동식, 박원국(무안군) △박진옥.박종필(완도군) ◎광주 △박인선(동구) △박흥균. 박풍동(남구)△박재일(북구) ◎제주 △박창수. 밀성박씨제주종 친회,박성호(제주시) ※충헌공 원당종중 단체구독(40名) 송금해주셨습니다. ※2021년4월13일자PC신한은행3 100로 입금해주신 고객님께서는 연락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TEL: (053)5 88-7300 한빛신문은 성손여러분이 함께만들 어가는 소중한 자산입니다 한빛신문은2007년창간이후선조님의행장과종중의약사집성촌,본관별세거지변천사등 수 많은자료를기록으로남기는방대한 작업을하고 있는‘성손모두가함께만들어가는종보’입 니 다.그역할을충실히하면서선조님의현창사업과후손들에게물려줄박문(朴門)의뿌리를연 구 하고다듬어데이터베이스화하는데앞장서겠습니다. 한빛신문임직원일 동 뱚뱚제보및구독신청안내:053-588-7300,070-4250-0078 ▶fax053-581-0067▶e-mail:parkss1012@han mail.net 뱚※성손여러분이납부하여주신구독료는신문발행에큰도움이됩니다. 월3,300원으로종보를함께만들어가는주인이되어주세요. 구독료를가까운금융기관에서자동이체(월3,300원)하여주세요 뱚뱚뱛구독료자동이체계좌453013-55-000691농협한빛신문 [5월구독료보내주신분,2021. 4.21~5.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