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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12월31일 목요일 4 (제168호) 관향조 종친회 노계(盧溪) 박인로(朴仁老, 1561년~1 642년) 선생과 그의 가사(歌詞/歌辭)문 학에 대한 재조명이 학술 분야에서 일어 나고 있다.가사문학을 재조명하는 것은 우리의정체성을확인하고,문화적우수 성을 재인식하는 차원이다. 그 중심에 조선 중기 영천 출신의 노계 박인로 선 생이있다. 지난 13일 영천시 북안면 도천리 소재 노계문학관에서는 노계박인로기념사업 회(회장 박진규 전 영천시장)가 주최하 고, 국제언어문학회(회장 강석근 동국 대 교수)가 주관한 ‘2020년 국제어문학 회 정기학술대회가 열렸다.이날 학술대 회의 주제는 ‘노계 박인로의 가사문학 사적공적과위상’이다. 학술발표에 앞서 영제시조연구소 허 화열 소장이 조홍시가(早紅枾歌)를 시 조창으로 불러 노계 작품의 아름다움과 품격을 과시했다. 또 노계박인로기념사 업회 박영환 사무국장이 ‘노계 선생의 가계와 문학적 업적’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노계 선생의 시에 대해 “인간의 삶 의 가치를 추구하면서 삶의 구도자로서 생활인의 정서를 담고 있다. 사대부 문 학에서 점차 평민문학으로의 변화를 예 고하고있다”고말했다. 이어서 이형대 고려대 교수가 ‘노계 박인로 가사의 심상공간과 그 의미 지 향’을(토론은 한창훈 전북대 교수), 박 수밀 한양대 교수가 ‘노계 박인로의 가 사 연 구 경 향 과 연 구 사 의 쟁 점 ’을 (토 론 은 임재욱 경북대 교수), 류해춘 성결대 교수가 ‘영남지역 가사문학의 위상과 현대화의 과제’를(발표는 이형우 한양 대교수)가각각학술발표를했다. “어리석고 우활하긴 이내 우(위)에 더할 이 없다. 길흉화복을 하늘에 부쳐 두고, 누항(陋巷) 깊은 곳에 초막을 디 어(지어)두고, 풍조우석(風朝雨夕·아 침 바람저녁 비)에 썩은 짚이땔감되어, 다 섯 홉 밥 세 홉 죽 에 연 기 도 많 고 많 네 . 얼마 만에 받은 밥븣 인정천리(人情天 理)에 차마 혼자 먹을런가”가사 누항사 (陋巷詞)에서는 선생이 빈한했으면서 도 흘러넘치는 인정을 베풀면서 이를 작 품화하는 데 여념이 없었음을 엿보게 한 다. 이형대 교수는 누항사를 소재로 “대 립적으로 공간 표상이 이뤄진 노계의 가 사작품들에서는 심상공간의 구성과 그 특질이 선명하게 대비돼 나타난다.그리 고 가사작품의 시상 전개와 관 련해 부정적인 공간 표상은 앞 부분에, 그리고 긍정적인 공간 표상은 뒷부분 에 배 치 해 그 의 미 지향의 흐름 을 자연스럽게, 그리고 강렬하 게 드 러 낼 수 있 었다”고 판단했 다. 박수밀 교수 는 노계가사의 특징과 우수성 에 대 해 “노 계 는 다 른 가 사 작 가 보 다 훨 씬 많은 가사를 창작함으로써 가사 작가 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하고 있다. 노계 는 ‘시(詩)는 뜻을 말하고, 가(歌)는 말 을 노래한다. 그러나 사람의 선한 마음 을 감발하게 하는 것은 가(歌)가 최고가 된다’라고 해 한시보다 가사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효과적이라고 생각 했다. 노계는 가사에 대한 분명한 작가 의식을 갖고 작품을 창작함으로써 특정 한 소재에 국한되지않는 다양한 가사를 창작해 폭넓은 현실 인식을 보여 주었 다”고결론지었다. 발표가 모두 끝난 후 이창식 세명대 교수가 좌장을 맡아 종합토론을 진행했 다. 이날 발표와 토론에는 노계박인로기 념사업회 회원과 국제언어문학회 회원 을 비롯해 일반인들도 다수 참석해 우리 의 가사와 시조에 대한 깊은 관심을 뿜 어냈다. 노계 선생은 조선시 대를 양분하는 임 진왜란 시기에 11편의 가사(歌詞/歌辭) 와 68수의 시조(時調)와 100여수의 한 시(漢詩)를 남겼다. 그는 60여수 밖에 전해지지 않는 조선시대 가사 중에 11수 를 남겼고,그의 청빈한 삶과 결부돼 ‘가 성(歌聖)’이라일컬어진다. 박인로(朴仁老, 1561년~1642년) 선생 은 송강 정철, 고산 윤선도와 더불어 한 국가사문학의 3대 시성으로 자는 덕옹 (德翁), 호는 노계(盧溪)·무하옹(無何 翁)이며,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영천 에서출생하였으며,어려서부터시에뛰 어났다.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 어나자 의병장 정세아(鄭世雅)의 휘하 에서 별시위가 되어 왜군을 무찔렀다. 이어 수군절도사 성윤문(成允文)에게 발탁되어그막하로종군하였고,1598년 왜군이 퇴각할 당시 사졸(士卒)들의 노 고를 위로하기 위해 가사 븮태평사븯(太平 司)를 지었다. 이듬해인 1599년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守門將)·선전관을 지 내고 이어 조라포(助羅浦) 수군만호로 부임하여 군사력 배양을 꾀하고 선정을 베풀어선정비가세워졌다. 뒤에 사직하고,고향에 은거하며 독서 와 시작(詩作)에 전심하여 많은 걸작을 남겼다. 1630년(인조 8) 노인직(老人 職)으로 용양위 부호군이 되었다. 박인 로가 남긴 중요한 작품으로는, 조홍시 가, 누항사, 선상탄, 사제곡, 영남가, 노 계가, 입암별곡, 소유정가, 노계집 등이 있으며,영천의도계서원에배향되고노 계집판목(蘆溪集板木)이 유형문화재 제68호로 지정되었다. /자료제공노계박인 로기념사업회박영환사무국장 국제언어문학회정기학술대회가 져 뱚뱚노계문학관서개최븣노계박인로의가사문학을학술로재조명 뱚뱚노계선생의위상확고히하고가사의우수성토론 노계 박인로 선생의 가사문학에 대한 재조명을 위한 학술발표회가 지난 달 13일 노계문학관에서 개최된가운데관계자들이 함께하고있다. 노계선생영정 노계선생 시향이 지난 달 31일 봉행되었다. 이날 제향의 제관은 초헌관 종석(宗錫), 아헌관 수환(樹煥), 종헌관 경동(敬東), 집례 동만(東晩),축관동 (寬東)이맡았다. 밀성박씨 좌상공파대종회(회장 영 배)는 지난 달 말 서석단지를 발행 배 포에 들어갔다. 이번 발행된 서석단 지는 1976년 서석단 건립이후 지난해 중수에 이르기까지 헌성한 성손들의 명단과 금액 그리고 서석단 사실 약 사(略史) 등을 수록하였으며, 예전방 식과 달리 가로쓰기와 한글 위주로 편집하여 젊은 층이 쉽게 볼수 있도 록 하 였 다 . 특히 무등산 공원관리구역과 상수 원보호구역, 개발제한구역에 위치한 서석단의 개보수가 현실 적으로 어려움이 있어 신청과 허가 과정을 소상히 기록하여 남김으로서 향후 개보수 할때에 행정관청에 허가를 얻을 수 있는근간이될것으로보인다. 영배대종회장은이번서석단지발행에앞서우리나라의미 덕 중 하나는 온 가족이 모여 조상에게 올리는 제사이다.사람 은 누구나 자기를 존재하게 한 근본인 조상에 보답해야 하는 데 이는 부모와 조상을 극진한 정성과 공경으로 섬기는 일이 다(報本之禮). 살아계신 동안 지성을 섬겨야 하며 돌아가신 후에도결코잊지않는것이인간의도리라할것이다.라며서 석단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지난해 여름 폭염에도 불구하고 수고한 분들과 어려운 형편에도 헌성하여 준 모든분들에게 고마움을전했다. 서석단은 밀성박씨 좌상공파의 파조(派祖)이신 고려벽상 공신 휘(諱) 춘(椿) 선조를 비롯한 아드님이신 나주목사 증 좌찬성 휘 인지(麟趾) 손자 고창현감, 낙안·예산군수 휘 정손 (貞孫),내금위장휘형손(亨孫)의제단으로좌상공께서요승 신돈에 의해 억울한 참화를 당한 이후 향화를 받들지 못하다 이곳 화암동 360-4 대지에 1976년 제단(祭壇)을 마련하고 향 화를받들어왔다. 그러나세월이흐름에따라울타리는녹이슬어흉물스러워 지고 바닥은 깨지고 솟아올라 걸음마저 어려울 지경에 이르 러 수차례 정비사업을 추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2 019년 3월 춘향을 계기로 오랜 숙원사업을 추진키로 했으나 각종 규제에 묶였고, 최초건립당시 인허가자료가 없어 허가 를 얻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으며, 취죽헌공 후 해준 현종은 바닥 석재를 무상공급하고, 무은공 후 승룡 현종이 현장을 방 문 설계를 하였고,인재공 후 희춘 현종은 시공을 맡아 아름다 운 공간으로 재탄생되었다. 특히 203명의 종원이 9천6백여만 원의 헌성은 어려운 재정을 타개하였고, 출가하였음에도 100 만원의 헌성을 해준 금자 현종(순천시청근무)은 전체 종원들 의귀감이되었다. 이에헌성하여준전종원과1994년부터지난해까지향사에 봉 성 하 여 준 분 들 의 이 름 을 새 겨 고 마 움 을 기 리 기 위 해 기 록 으로 남겼으며, 인쇄는 족보문집 전문업체 대보사(대표 박도 규)에서 하였고,발행부수는 500부로 헌성한 종원 203명과 각 문중에전달할계획이다. 밀성박씨좌상공파대종회‘瑞石壇誌 ’발행 서석단중수를기해그과정과약사기술(記述) 박영배회장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의리사상을 실천함으로써 선생이 걸 어간 길이 호남인의 정신이요 사상으로 후학들의 추앙을 받 아온 기묘명현 눌재 박상(1474~1530) 선생의 추모 제향이 지 난달30일광주서구절골마을소재봉산재에서있었다. 이날 제향은 코로나 19로 인해 소수 인원만 참석 봉산재 뒤 편에 모셔진 묘소 참배 후 종표 집례관의 창홀에 따라 초헌관 진,아헌관 빇표,종헌관 창규 현종이 차례대로 헌작하고 축관 태철, 우집사 승철, 좌집사 홍남 현종이 각각 소임을 맡아 질 서정연하고차분하게제례를봉행했다. 이날 제향 축문에는 창궐역병(猖獗疫病)의 문구가 들어있 어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후손들의 참례가 어렵고 제수와 절 차등을고하면서도정성을다하는모습은선조의유풍(遺風) 을 따르려는 모습이 역력했으며, 제향 후에는 선생의 아들과 손자등후예의제향이이어졌다. 눌재 박상 선생은 호남지역 입향조 찬성공(휘 지흥(智興, 1 411~1489)의 둘째 아들로 광주에서 태어난 문간공은 연산군 2년(1496) 23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501년 정시문과 을과 에 급제하였다.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를 시작으로 조정의 요직을 거쳤으며 자원하여 담양부사로 나갔으며 충주목사로 재직할때청백리로선록(選錄)되었다. 1506년(연산군 12) 8월, 나주지역에서 행패를 부린 연산군 이 총애하는 여인의 아비 되는 우부리(牛夫里븡일명 김소부 리)가 권세를 믿고 행패를 부리자 전라도사의 자격으로 그를 나주 동헌으로 불러 몽둥이로 때려 죽게 한 일, 전북 순창 강 천사 앞에 세워진 삼인대를 보면 정조대왕께서 “三印其臺 萬 古不?”이라고 신비복위를 청하는 상소를 올린 朴祥븡金淨븡柳 沃 삼현(三賢)세 분을 칭송한 바 있어 선생의 절의정신을 엿 볼 수 있 다 . 정조임금은 1799년 좌부승지 윤광안을 보내 제사를 지내도 록하였는데 그 치제문은 뷺태평은 별다른 형상없고,교화의 아 름다움으로 일리워지도다. 크게 상줌은(정의의 실천을) 권면 함을 나타내고,북을 울리는 것으로 군의 사기를 돋군다.충의 는 사람에 달렸으되 그것을 몸소 행하는 사람 드물다. 경(卿) 이 담주부사(담양)에 취임했을 때 같은 뜻을 지닌 이와 이웃 이 되었었다. 그 대(臺)에 세 개의 인(印)을 건 일,(그 절개) 만세토록 변치 않으리라. 우리가 신위의 벼리를 붙드는데, 그 누가 조정에서 사납게 떠드는가.반드시 백방으로권면(勸勉) 이 된다. 논 정(論定)한 것은, (영조대왕의) 1759년부터이다. 선왕이 이르시되 아아, 엄숙하 게 만드는 것(淸朝의 琴) 붉은 絃(현에서 울려나는 소리 듣는 것) 같다. 홀(笏)을 찾아 후손 등 용 하 니 남 긴 곧 은 절 개 버 리 지 않는거다. 옛날에도 행행했 는데, 지금이라고 소홀하게 할 수 있겠는가. 사판(祠版, 신주) 을 영원히 받들어 제향을 드리 게 하 고 먼 후 손 (後 孫 )에 게 까 지 대대로 벼슬을 살게 하리라. 태 실(太室)에 정식(庭食)케 하니 그 禮 융숭하고 볼만하다. 이 해 에 한차례 제사를 드림은 干支 (즉 己未年)에 느끼는 바 있기 때문이다. 붓을 잡고 시운(詩 韻)생각하니 송백(松柏)꼿꼿하다.뷻이로부터 불천지위로 제 향을받들고있다. 한편 이날 제향이 봉행된 봉산재(鳳山齋)는 1919년 창건되 고, 지난해 중건되었으며, 재호(齋號)를 봉산재라 함은 뒷산 이름이 봉황산으로 눌재선생을 봉산거사라 하여 봉산재이고, 퇴계선생은 눌재선생을 원우의 완인 이라 하여 절의를 완성 했다는뜻으로대문을완절문(完節門)이라한다. /박상섭 편집국장(parkss1012@hanmail.net) 기묘명현눌재박상(朴祥)선생추모제향(時享 )봉행 눌재선생아들(민재·민중),손자등이어봉행 봉산재제향광경 정조의 치제문을 서예가 취석 박 원해선생이 옮겨적어봉산재에 걸었다. 밀양박씨 사 문진사공 后 갈 충 공 파 종 중 회 (회장 병수)는 지 난 달 ‘뿌 리 를 찾 아 서 ’ 를 펴냈다. 2019년 3월 제19대 회 장으로 취임한 병수 회장은 책 을 펴내면서 조 상님들의 발자취를 오늘에 되새겨보며 종중의 발전과 안녕을 기원하는 것은 삶 의 근본을 알아가는 것이기에 그 의미가 대단히 크다며 각종자료를 수집하고 소 문중의 현황을 파악하는등 심혈을 기울 였다. 이 책은 먼저 시조왕의 탄생 등 선원 사적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밀양박씨의 유래 등 상계와 사문진사공(휘 원)을 비 롯한간의대부공까지의약사,삼송재소 개, 갈충공(휘 종남) 약사, 충신효자(삼 정문)소개,갈충공종중회현황,소문중 별 계보 등 갈충공파종중에 대해 소상히 소개하고있다. 박병수 회장은 책을 통하여 보다 더 많은 종원분들이 종중을 이해하고 소중 함을 인식하여 종회에 대한 관심과 참여 가 이루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며 옛것을 통찰하여 오늘날 내가 살 아가는 좌표로 삼고, 또한 자부심으로 다른 씨족과 가문과는 차별의식을 가져 자신의 삶에 이정표로 삼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강조했다. 그리고 편집을 하면서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준 홍교 고문님에게 감사를 드리 고 만영, 현수 부회장에게도 함께 고마 움을표시했다. 갈충공파는 갈충(竭忠)이란 명칭에 서도 나타나듯 충을 다 한 것으로 충효 지사(忠孝之士)가 이어지는 보기 드문 가문으로유명하다. 경 기 도 남 양 주 시 이 패 동 을 중 심 으 로 강원 원주, 경남 밀양, 경북 청도 등에 세거 하고 있는 갈 충 공 파 의 문호는 임 진 왜 란 을 겪으면서 몸소 왜적을 무찌르며 정의 로움을 보인 무장으로 여진족의 추장 니 탕개의 난을 진압하는 등 충의(忠義)의 인물로 꼽히는 휘 종남(宗南) 公으로부 터문호를열고,그의 아들 충장공(휘영 신)과 손자(휘 지병)에 이르러 충신과 열녀,효자 등 정려(旌閭)가 내려짐으로 서 명문가로서 그 위치를 확고히 하고 있다. 사문진사공후갈충공파‘뿌리를찾아서’펴 내 종중을이해하고소중함을인식하여종중에대한관심가져주길 박병수회장 한빛신문은성손여러분이함께만들어가는소중한자산입니 다 한빛신문은 창간 13주년 동안 선조님의 행장과 종 중의 약사 집성촌, 본관별 세거지 변천사 등 수많 은 자료를 기록으로 남기는 방대한 작업을 하고 있는 ‘성손모두가 함께 만들어가는 종보’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하면서 선조님의 현창사업과 후손 들에게 물려줄 박문(朴門)의 뿌리를 연구하고 다 듬어데이터베이스화하는데앞장서겠습니다. 한빛신문임직원일동 뱚▶제보및구독신청안내: 뱚뱚053-588-7300,070-4250-0078 fax053-581-0067 뱚뱚e-mail:parkss1012@hanmail.net ※성손 여러분이 납부하여주신 뱚구독료는 신문 발행에 큰 도움 뱚이됩니다. 뱚뱚월3,300원으로종보를함께만들어가는 뱚뱚주인이되어주세요.구독료를가까운 뱚뱚금융기관에서자동이체(월3,300원)하여 뱚뱚주세요 뱚구독료자동이체계좌 뱚453013-55-000691농협한빛신문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