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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11월30일 월요일 4 (제167호) 관향조 종친회 학문과 덕행으로 이름을 떨쳤던 송계 금인(1510~1593), 삼송 남몽오(南夢鰲, 1573년 무렵), 도승지 박선장(朴善長, 1 555~1616), 도은 권호신(權虎臣, 1558~ 1629)등 4현의 학덕을 추모하는 제향이 지난 달 31일 경북 봉화군 봉화읍 화천 리 구만서원 상현사에서 지역 유림주관 으로진행되었다. 김계일 집례관의 진행으로 봉행된 이 날 제례는 박성환 현종이 초헌관으로 헌 작하고 이어 유태형 아헌관, 박세영 종 헌관이 차례대로 헌작하고 박종섭 축관 의독축으로봉행되었다. 구만서원은 1611년(광해3) 11월 구만 에 서당을 창건한 것이 모태다. 1670년 (경술)10월에 향중이 발의하여 여러 지 방에 통문을 보내고 묘사(廟祠)를 이룩 하고 기영사(耆英祠)라하고 1676년 송 계 금인, 삼송 남몽오, 도승지 박선장, 도은권호신등4현의위패를봉안했다. 구만서원은 이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 쳤으나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 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67년에 다시세워져오늘에이른다. 구만서원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아 담한 건물이다. 대문도 본채 건물처럼 작고 아담하다. 정면에 나와 있는 기둥 들은 전부 원형이다. 그러나 뒤편의 기 둥들은 각재이다. 정면 기둥선 앞으로 폭이 40㎝ 정도의 앞마루를 두었다. 앞 마루는 양쪽 끝의 1칸씩은 5㎝ 쯤 높고, 가운데2칸앞으로는5㎝쯤낮다. 건물의 가운데에는 정면 2칸, 측면 2 칸의 마루가 있다. 이 마루 역시 그것의 앞마루보다는 5㎝ 정도 높다. 그러니까 가 운 데 2 칸 의 앞 마 루 만 5 ㎝ 정 도 낮 고 , 나머지 모든 마루는 높이가 같은 것이 다. 건물의 좌·우 양끝으로는 정면 1칸, 측 면 2 칸 의 방 이 각 각 만 들 어 져 있 다 . 방은 정면으로는 2쪽의 방문을, 측면 으로는 각 칸마다 1쪽씩의 방문을 똑같 이 달고 있다.마루의 뒷벽은 아래 4분의 3 정도는 나무판 문과 나무판 벽으로 되 어 있고,위의 4분의 1 정도는 옆으로 긴 창인데 마름모꼴의 창살을 빈틈없이 만 들어 넣어서 바람과햇살의 통행을 자유 롭게하였다. 강당은 흥교당(興敎堂) 으로 위패를 모신 사당은 상현사라한다. 구만서원 경내에는 오륜 가(五倫歌)시비가 세워져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오 상의 근본을 깨우치게 하 고 있다. 또한 편액이 정면 4 칸 중 동 쪽 으 로 제 2 칸 인 마루 안쪽 지붕 아래 게시 되어있다. 오륜가의 현판에는 ‘인 심이 쇠퇴해가는 것을 탄 식하며 권선징악의 뜻을 담아 지은 노래’라는 서문이 한문으로 적혀 있고, 그 아래에 한글 노랫말이 길 게기술되어있다. 또 십물잠(十勿箴)이 동쪽 방의 마루 쪽 벽 위 천 장 아 래 게 시 되 어 있 으 며 매 년 3월 중정과 9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 고 있으며, 제수(祭需)의 진설은 4변 4 두이다. 경북봉화구만서원추향봉행 금인·남몽오·박선장·권호신등4인의선현추모 구만서원의 추향이 지난 달 31일 경북지역 유림주관으로 봉행된 가운데 참례한 유림들의 의복이 유학의정도를가늠해볼 수있을만 하다. 제물 봉진에 앞서 강당인 흥교당에서 제수를 점검하고 있다. 구만서원의제향은그 의식이 엄격하기로 정평이 나있다. 정몽주 문하에서 수학하고, 고려 말~ 조선 초에 왜구 정벌에 활약하여 이조참 판과 도총부부총관(都摠府副摠管) 등 을 역임한 무신 박성양(朴成陽)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는 제례가 지난 2 0일 경북 의성군 가음면 양지리 소재 명 곡서원경덕사에서있었다. 이날 제향은 당초 2월 하정(下丁)에 유림향사로 봉행하려던 것을 당시 대구 경북지역 코로나19 환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궐향하게 되어 음력 10월 6 일 봉두산의 묘소에서 봉행하는 시향을 서원 경덕사에서 본손 제향으로 봉행 되 었으며, 오전 9시 집사 분정을 위한 개 좌에서 초헌관 박기태, 아헌관 박진, 종 헌관 박재술, 축관 박청환, 집례 박해율 을 천거하여 분정 된 제관이 각각 소임 을 맡아 질서정연하게 봉행하고, 이후 장소를 명곡서원 강당인 명교당(明敎 堂)에 판삼사사로 함양군에 봉해진 휘 지량(3파 파조)을 비롯한 이하 13대 신 위를모셔추향을지냈다. 판삼사사공의 제향은 함양 영명재에 서 봉행해 왔으나 이번 제향이 코로나19 로 인해 간소화 되면서 이날 봉행하게 되 었 으 며 , 그 이 하 선 조 시 향 또 한 당 초 묘소에서 지내오던 것을부득이 이날 서 원강당에서합사(合祀)하게되었다. 명곡서원은 무신 박성양(朴成陽)의 학문과덕행을추모하고,지역민의교육 과 후진양성을 위해 순조 18년(1818)에 창건되어 철종 2년(1851)에 사액되었 고,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철폐 령으로 훼철되고 그 뒤 1905년 명곡서당 으로 후학양성기관으로 운영되다 1975 년 명곡서당을 명곡서원으로 복원하여 지금에이르고,지난2017년의성군문화 유산제37호로지정되었다. 박성양 선생은 고려 말 28은(隱)의 한 분으로 관향은 함양 호는 금은(琴隱), 시호는 정헌공(定憲公)이다. 중시조 상 서공 휘 선(善)의 10대손이며, 고려 무 덕장군 판삼사사 휘 지량의 5대손으로 의성봉양에서태어났다. 태조6년 5월에 왜구가 남해안에 침입 하여 백성이 어육을당하고 있으니 조야 (朝野)에서공론이븮박성양은 문무를 겸 전한 용감한 인재로서 왜적을 격퇴시키 는 데는 가장 적절한 인물이오니 등용 하시옵소서븯하고 천거 하자 태조는 왜구 정벌원수로 삼았다.선생은 일신의 영달 을 위한 소명은거절하였으나 나라와 백 성을 구휼하는 일이기에 흔쾌히 수락하 여 부산포로 달려가 60일 만에 왜적을 소탕하고 대첩을 거둬 태조는 븮3자의 큰 칼로 사직을 안정시키고 한줄기 채찍 끝 으로천하를평정하였네.븯라며어사시를 하사하였다. 이후 광주목사,우군절제사,우군동지 총제, 이조참판겸 도총부부총관을 역임 하고 은퇴 후 고향으로 돌아와 제손(諸 孫)들을 위시하여 인재양성에 매진하였 으며, 고종 5년에 이르러 자헌대부 이조 판서 겸 성균관제주 오위도총부도총관 의 증직과 시호를 정헌(定憲)이라고 함 께내려졌다. 한편 이날 제향에는 전통예절지도사 로 각급 유림향사와 박정희대통령 추모 제·탄신제등의집사를맡아온해율현종 (명곡서원 보존회 총무)이 집례를 맡아 홀 기 를 알 기 쉽 게 풀 이 하 고 , 제 관 및 집 사 행동요령(절차) 등을 자세하게 설명 하면서 참례한 모든 참제원들에게 유익 한정보를제공하여박수갈채를받았다. 금은박성양선생추모제향봉행 명곡서원경덕사,함양박씨판삼사사공(휘지량)이하13대추향이어져 금은박성양선생의추모제향이 지난 20일명곡서원경덕사에서봉행된가운데참례한 제관들이 사 회적거리두기실천을위해1m이상거리를두고기념촬영을하고있다. 경덕사에서봉행된 금은선생제향에청환축관 이 독축하고있다. 명교당에서봉행된판삼사사공이하 합사광경 은산부원군(휘 영균)과 그의 둘째 아 들 전 갱 령 의 시 향 이 지 난 1 5 일 경 남 창 녕군 계성면 광계리 소재 추원재에서 봉 행되었다. 이날 제향은 ‘코로나19’로 인 해 참례인원을 한정하면서 인근 종원과 임원진만이 참석한 가운데 아침 일찍 개 좌를 열어 초헌관 영광(永光븡보본재 회 장), 아헌관 해원(海元븡물언재 회장), 종헌관 동춘(東春, 전객령공 后) 집례 용건(鏞建) 축관 명상(明相븡인당공 后) 현종을 추대하여 이날 제관으로서의 소 임을다했다. 추원재(追遠齋)의 정확한 창건연대 는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 알 수 없으나 은산부원군(휘 영균)의 묘소가 인근에 있고 수 백년 향화가 이어져 오고 있어 오래전부터 건립되어 재숙소로 사용하 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해본다. 그리고 1823년 중수기(重修記)를 보면 갑자(甲 子,1804)년 봄에 족보 수보시 매년 참례 종원이 늘어나고 장소가 협소하여 중건 을 토의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이후 1 920년(庚申)중수를결의하여1922년후 손 지묵(持默), 1924년 후손 한묵(漢默) 의중수기가전해진다.중수기를보면19 22년(壬戌年)년에 중수한 추원재는 추 모재(追慕齋)라개편(改扁)하였다. 현재의 재사(齋舍)는 80여년의 세월 속에 퇴락해져 불편이 초래되어 2002년 (壬午) 가을 총회에서 종의(宗義)로 뜻 있는 종친을 선두로많은 종친들이 마음 과 힘 을 있 는 대 로 다 (진 심 갈 력 ,盡 心 竭 力)하는 등 앞 다투어 성의를 모아 2003 년(癸未年) 5월에 착공하여 추모재를 추원재로 환원(還元) 개액(改額)하였 으며 전면 5칸 측면 2칸으로, 이보다 앞 서 추원재 본당 착공 전 1994년 5월 서재 (西齋) 공선재(恭善齋)를 중건하였고, 2000년 9월 大門 정광문(精光門), 동재 (東齋) 청덕재(靑德齋)를 중건(重建) 한바있다. 한편이날제향후가진총회에서는특 별한 안건 없이 수입·지출 결산 및 감사 보고에 이어 기타 안건으로 상정된 제례 홀기수정의건은이의없이가결했다. 추원재는 지난해까지 전일 입재하여 집사분정을 마치고 다음날 묘소에서 제 향을 봉행했다.그러나 지난해 총회에서 당일입재하여 재사(齋舍)에서 봉행키 로 바뀌면서 홀기 수정이 필요했고, 이 하 후대의 홀기와 상이한 부분이 있어 이번 은산부원군 이하 각 지파의 홀기를 통일하기로했다. 은산부원군의 휘는 영균(永均~1300) 은 양효공 간의 큰아들이다. 고려조에 익대공신으로 벼슬은 판도판서와 삼제 (三帝)를 역임하였고 응천군으로 봉군 되었다. 뒤에 또 은산부원군(銀山府院 君)으로 추봉되었다. 시호는 문헌(文 憲)으로 사시되었고 묘소는 경남 창녕 군 계성면 광계마을 뒤 을좌(乙坐)구릉 에 있다. 부인은 능성구씨(綾城具氏)로 문하좌정승(門下左政丞)을 지낸 문정 공(文貞公) 의( 陞)의 딸이다. 배위(配 位)재령이씨(載寧李氏)는 신라 경순왕 의 사위인 재령백(載寧伯)을 지낸 우칭 (禹稱)의후손이다. 은산부원군 휘 영균은 슬하에 아들 셋 딸 넷을 두었는데 첫째는 익(翊:초휘는 天翊)이요, 둘째는 천경(天卿), 셋째는 문경(文卿)으로 이날 오전 은산부원군 과 차자 전객령공(휘 천경)시향이후 장 소를 각각 옮겨 장자 송은공(휘 익)은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 보본재, 셋째 순 찰사공(휘 문경)은 고령군 덕곡면 용소 리 모원재로 이동하여 같은 날 오후에 각각시향을봉행했다. 추원재 추향 봉행 추원재와은산부원군묘소전경. 당일입재 후 개좌 열어 재관분 정 제례홀기각지파등단일홀기제작키로 은산부원군 시향이 지난 15일 추원재에서 봉행 된가운데박영광초헌관의첫잔을올리고있다. 경남 산청군 응봉산(鷹峰山)에 축원 을 기원하는 낭랑한 독축소리가 뭇 사람 들을감화하는듯울려퍼졌다. 9월 중정(中丁)을 맞은 지난 달 31일 봉행된 추모제향은 ‘코로나19’ 방역지 침에 따라 소수 인원만 참례한 가운데 경남지역 유림 주관으로 봉행되었으며, 박씨산청군종친회 박순제 사무국장이 집례를 맡아 초헌관 정태근, 아헌관 하 형락, 종헌관 박해원 유학자가 각각 헌 작하였으며, 진주시 박종식 유도회장이 독축하고, 알자 박승제, 찬창 박춘재 유 학자 등이 각각 소임을 맡아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특히 이날 제향은 멀리 서 울에서 본손인 박종도 밀성박씨 졸당공 파 종친회장이 참례하여 제관들의 격려 를아끼지않았다. 신계서원은 두문동 현인으로 고려충 신 송은 박익 선생과 그의 아들 아당(諱 調), 졸당(諱 聰) 선생을 모신 서원으로 단성(丹城)의 유림들과 단계(丹溪)에 살던 후손 상채(後孫 尙采)와 그 외 운 잉(雲仍)들의 협력으로 경영(經營)하 기를 1836년(丙申 헌종2)에 시공(始工) 하여 1869년(己亥)에 工役)을 마쳤다. 뱚이때 간사(幹事)는 후손 용진(龍振) 公이다.규모는사우3칸,강당5칸,그리 고 대문 3칸, 서재 3칸, 주고(酒庫) 3칸, 소루(小褸) 4칸이다. 원호(院號), 사호 (祠號), 문호(門號) 등의 편액(扁額)은 감역 이충익(監役 李忠翼)이 글씨를 썼 다. 헌종 5년(1839) 신계서원 정충사(貞 忠祠)에 송은 박익 선생을 주벽으로 영 정(影幀)을 봉안하고 아당(啞堂), 졸당 (拙堂) 두분의 배행하고 춘(春) 3월 추 (秋) 9월 중정(中丁)에 유림에서 봉향 (奉享)하였다. 1847년(헌종13)에 신계서원 유생들 이 예조에 송은 선생의 숭모의 향사를 받드는 절차와 범백(凡百)을 다 갖추었 으니 대현(大賢)을 받드는 전당(殿堂) 이 오래토록 보호받고자 신계서원의 사 액(賜額)을 청원상언(請願上言)하니 예조실록에부표(付標)되었다. 이에 이듬해(1848 戊申) 춘향시부터 단성현감이 폐백(幣帛)과 제수(祭需) 를 보내왔으나 1868년(고종5 무진(戊 辰))에 조정의 서원 철폐령으로 인하여 모든 서원이 훼철되니 신계서원 역시 18 71년(辛未)에 훼철됨으로 향사 받드는 일이 중단되고 선생의 영정 또한 봉안하 지못하였다. 1875(고종12 乙亥)년에 子孫들의 합 모(合謨)로 응봉산 중턱 현 위치에 영정 각(影幀閣) 3칸과 세한재(歲寒齋) 3칸 을 건립하여 송은선생의 영정을 봉안하 고 후손들이 춘추 로 향화(香火)를 받들었으며 학당 (學堂)으로 이어 졌다. 그후 1917(丁 巳)년에 향중(鄕 中)의 유림들의 공의(公儀)로 송 은선생 위판(位 版)을 복설(復設) 하여 3월 중정일 에 석채례(釋菜禮)로 봉향하였으며 사 림이 회강(會講)하고 유계안도 성안(成 案)되었다. 1939년(丙子)에 재사(齋舍)가 노후 (老朽)하여 보전이 어려웠고 유생들의 회강(會講)하기에 협소하여 후손들이 일을 맡았고 유림들이 도와 세한재(歲 寒齋)를 철거하고 중건 5칸으로 확장하 여 재호(齋號)를 신계정사(新溪精舍) 로 사호(祠號)를 송은선생영당(松隱先 生影堂)으로 다시 현판(懸板)하고 유림 들의강학지소(講學之所)로이어졌다. 1985년(乙丑) 3월 채례시(菜禮時)에 유림들이 신계서원을 복원하자는 공의 (公 儀 )가 있 은 뒤 후 손 들 이 그 일 을 맡 았고, 유림들이 도와 經營하니 사우3칸 과 내삼문 그리고 대문3칸을 중건하고 주위를 정화했으며 제기 18점이 지방문 화재 제135호로 지정되어 관리당국에서 문화재 보호각(東齋)3칸을 중건하였으 며 원우(院宇)를 번와( 붕瓦)하고 보수 를 하였다.1989년 3월 11일 신계서원 복 원을 조성하니 송은 선생을 주벽으로 봉 안하고 아당, 졸당 두분 선생을 배향하 여3월중정일에배향한다. 신계서원의 내삼문의 문호를 집현문 (集賢門)이라 하였으며 사당인 정충사 (貞忠祠)로 통하는 문의 문호를 불이문 (不貳門)이라 하여 송은선생의 불사이 군의충정을나타내고있다. /박순제명예기자(경남산청군지부) 경남산청신계서원추향봉행 경남지역유림,고려충신송은선생과두아들등3부자의학덕기려 경남산청의신계서원향사가지난 달 31일 유림행사로 이어진 가운데참례한 제관들이 함께하고 있다. 신계서원전경,맨위쪽건물이 사당인정충사,그 아래가강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