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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해는 1910년 망국 후 해외로 망명하여 연해주(沿海州)와 만주(滿洲) 일대에서 독립운동 방략을 모색하다가, 1919년 2월 중국 길림에서 길림군정사(吉林軍政司) 결성에 참가하였다. 길림군정사는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의 후신으로 무장투쟁노선을 지향했는데, 이때 그는 선전 및 연락을 담당하였다. 이후 국내로 돌아온 그는 1920년 6월 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大邱支會) 결성을 주도하면서, 대구와 경북 일대에서 노동운동 확산에 힘을 기울였다.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이 결성될 때 전형위원·기초위원·중앙집행위원으로 활약했다. 동년 11월 서울에서 김약수(金若水) 등과 함께 사상단체 북풍회(北風會) 결성을 주도하여 집행위원에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5년 4월 조선공산당 결성대회에 참석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면서 노농부를 맡았다. 동년 12월 제1차 조선공산당사건(朝鮮共産黨事件)으로 인한 검거를 피해 일본으로 탈출하여 조선공산당 일본연락부에 가입했다가 조공 일본부가 파괴되자, 다시 간도로 망명했으나 1927년 5월 간도(間島)에서 체포되어 1928년 5월 징역 3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