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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광동 중산대학에 재학 중 김원봉·오성륜의 권유로 1926년 8월 의열단에 가입하여 선전출판부의 책임을 맡았다. 이 무렵 의열단은 근거지를 상해에서 광동지역으로 옮겨 유오한국혁명동지회를 주도적으로 이끌면서 민족전선의 통일운동에 앞장서 나갔는데, 그는 동 단체의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그 후 국내활동의 임무를 부여받아 귀국한 그는 1927년 신간회가 결성되고 전국 각처에 신간회 지회가 설립될 때, 통영지회에 가입하여 총무간사와 서무부의 일을 맡았다. 이 같이 그는 신간회 통영지회를 중심으로 표면활동을 벌이는 한편 비밀리에 동지를 포섭하면서 의열투쟁의 계획을 추진해 갔다. 그러던 중 1928년 6월 중국에서 의열단 중앙집행위원 서응호가 귀국하자 마침 열리게 될 박람회를 기회로 삼아 일대 거사를 계획하다가 1929년 10월에 피체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는 1929년 12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