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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문(國譯文) 사옥(社屋)10년 기미년 봄에 면우 곽선생이 전국 유림 대표 137인을 거느리고 한국독립을 세계평화회의에 청원하니 천하인이 깜짝 놀래고 2천만 민생에 정기를 격동시켜 식민통치에 항쟁하니 세상에서 일컫는 바 파리장서가 이것이다. 그때를 당하여 영남 호남의 분참자(奔參者)가 가장 많았는데 의령에서는 삼현이 연서하였는데 수산 선생이 그 한 분이다. 기미년 정월에 태황이 승하한 즉위를 베풀어 망곡(望哭)하였고 3일 인산에는 대한문 외에서 분곡(奔哭)하고 돌아와서는 이어 곽선생의 명을 받아 장서 연서인을 함안 칠원 달성 등지에서 모우고 얼마 후에 김 심산 창숙이 장서를 가지고 상해로 출발함에 그 장도(壯途)를 환송(歡送)하였다. 별안간 에 4월 초 2일 성주시일을 기하여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장서의 전모(全貌)가 탄로되어 면우 선생과 장 회당(晦堂) 석영 송 공산(恭山) 준필 성 오봉(五峯) 대식 제현(諸賢) 등 수백인이 대구옥에 구속되었다. 그런데 공은 마침 명자(名字)의 착오(錯誤)로 면하여서는 곽 겸와(謙窩) 대연과 함께 자나깨나 옥외(獄外)의 일을 주선(周旋)하였다. 10월에 면우 선생이 들것에 실려 보석되었으나 얼마 후에 세상을 떠난 즉 공은 시종(始終) 선사(先師)의 상사(喪事)에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을축년에 선사집(先師集) 180여권을 서울 간소(刊所)에서 인출(印出)하니 때마침 심산공이 중국으로부터 잠입하여 국외 유림 만나기를 요구하고 다시 회복할 계책(計策)을 도모하고 장차 모금하여 중국 교포를 구활(救活)하려 하였다. 이에 공은 여러 사림과 함께 의리로 규합하고 내응(內應)하여 활약하다가 말구(末久)에 이 일이 발각되어 제공이 모두 투옥되니 세상에서 이르는 바 제2유림단 사건이다. 공이 이르기를 내 비록 힘이 적어 적을 멸하지는 못하나 그러나 어찌 차마 머리를 숙이고 포로(捕虜)가 되겠는가 하고 곧 바람처럼 서해반(西海畔) 금강산중으로 피신하여 은거(隱居)하되 자나깨나 민족정신을 들춰 일이 나라에 관계(關係)되면 수옥(囚獄)을 두려워하지 않고 남 먼저 앞장섰다. 그런데도 수년 세월 동안 적에게 체포되지 않았으니 기적이라 이르겠다. 또한 당시 왜경의 노기(怒氣)에 가족은 동서남북으로 이산되고 선생의 종질 홍기와 문인 강인중이 공가(空家)를 돌보는데 힘입었으니 그 참상을 무엇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태풍이 일과(一過)한 뒤에야 임천정(臨川亭)에 평안히 거하면서 성리학을 탐구하고 원학자(願學者)에 수업하여 도서(圖書)에 둘러써여 화죽(花竹)을 즐기면서 노년에도 학문을 닦으면서 늙음을 깨닫지 못하더니 마침내 70세로 광복 7년 11월에 사세(謝世)하여 명년 정월에 사림이 월현 자좌원에 회장(會葬)하니 곡송(哭送)하는 이 천여인(千餘人)이라. 후 52년 갑신 광복절에 정부에서 건국공로훈장 애족장을 추서하니 어찌 탁연(卓然)하지 아니한가. 생각컨데 선생은 살아선 유도(儒道)의 진리를 추출(抽出)하고 몰후(歿后)엔 오히려 보동(報動)하여 드러나니 이는 몰(歿)하여도 산 것과 같도다. 어찌 이름을 백세토록 드리워 꽃다움을 끼치지 않겠는가. 얼마 뒤 중손(衆孫)들이 향사(鄕士)로 더불어 묘근(墓近)에 수비(樹碑)하여 장차 미업(美業)을 무궁히 송모(頌慕)코자 손 종경이 비명을 인찬에게 청하며 이르기를 오늘의 역(役)은 감히 늦춘 것이 아니라 실은 기다린 것이니 집사(執事)는 사양(辭讓)하지 말라 하니 무엇을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