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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죽교 정래영선생 공적. 정래영공의 본관은 영일인이요. 字는 武範(무범)이요, 號는 竹橋(죽교)이다. 서기 1899년 1월 19일 감포읍 팔조리 흥덕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성품이 강직할 뿐 아니라 활달하고 총명한 재질을 타고나 일찍이 한학을 닦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신학문을 배우고자 서울로 올라가 휘문의숙을 졸업했다. 애국심이 또한 투철하여 항상 국가의 쇠퇴해감을 개탄하고 민족의 앞날을 걱정해왔다. 1919년 간악한 일제에 항거하는 온 민족적인 3.1독립항쟁이 전국 각처에 불길처럼 일어났다. 그는 약관의 피 끓는 나이로서 떨치고 일어나 동지를 규합하여 서울에서 독립투쟁을 벌였다. 일제 관헌의 무력탄압으로 뜻을 이ㄹ지 못하고 좌절되자 고향으로 돌아와 대구, 서울 등지의 동지들과 연락하며 재거의 기회를 엿보아왔다. 1920년 4월 그는 온 민족적인 3.1독립항쟁마저도 실패를 하였으므로 독립운동 방법을 바꾸어 상해 임시정부및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를 적극도와 독립을 찾기로 하였다. 성두완, 최규해, 김종철, 김봉규, 정두희, 노기용, 정두규, 정동석 등 동지와 더불어 대구에 마련된 연락소에서 비밀리에 여러 차례에 걸친 회의를 열고 서로가 뜻을 모아 많은 동지를 규합하여 해외의 항일운동단체와 연락하여 구국운동에 신명을 바치기로 맹세하고 각자가 활동을 개시하였다. 동년 9월 만주이 서로군정서 발행의 예경령, 의용단 위임장, 군자금 모집임원 사령, 하형집행서, 권총, 탄약등을 군정서 김응섭의 주선으로 신의주에 상주하는 송상욱을 통해 송두환, 김종철 등이 반입하였다. 이를 대구 정독석의 집에 숨겨두고 각자가 필요시에 이를 몸에 지니가 담당 지역별로 동지들과 연락하며 실행해 옮겼다. 그는 지방을 맡아 의령의 재산가인 남종구 등 각처의 애국 동포들로부터 군자금 모집에 힘을 기울이며 동분서주히였다. 동년 12월 8일 김종현, 김봉규가 감향헌 일경 감비수 사살사건이 발행하여 김종철은 즉시 만주로 망명하였다. 일제 경찰의 수사는 점차 확대됨에 따라 군위에서 최윤동이 체포됨으로써 모든 활동의 정체가 탄로되어 그도 여러 동지와 함께 일경에 붙잡혔다. 대구법원에서 이른바 불법무기소지, 보안법 위반 등 죄목으로 2년형의 선고를 받아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고 만기로 풀려나왔다. 그는 출옥한 뒤 동지들과 연락하여 재기를 꾀하고자 당분간 국내활동은 불가능함을 깨닫고 해외망명을 결심한 나머지 만주로 건너가니 때는 1924년 4월이었다. 그는 만주의 서로군정서에 참가해 선배 동기들과 독립운동에 종사했다. 그 후 북경으로 넘어가 배천택, 김종철 등 동지와 의열단을 도와 일제 기관의 정보및 일제의 앞잡이를 처단하는데 주력하며 동분서주하였다. 1926년 3월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이 김응섭을 만나 임시정부의 군무부에 들어가 연락 임무를 띄우고 중국, 상해, 만주등지를 왕래하였다. 1932년 애국단의 상해 흥구공원 기시로 임시정부가 절강성으로 친고하게되자 그는 임시정부의 밀령에 의해 군자금 모집의 사명을 띠고 비밀리에 입국하였다. 국내 경계는 삼엄하여 감시를 피해 경기도및 강원도 지방을 돌며 함경도에 이르러 북한으로 건너가고자 하였다. 1937년 중.일 전쟁이 터지자 그는 하는 수 없이 일경의 눈을 피해 국내를 돌며 지하운동을 벌이는 중 기쁨의 광복을 맞이하여 건국사업은 물론 초대 읍 의원으로 뽑혀 지역사회개발에 이바지하다가 1960년 4월 23일 세상을 떠나니 향년 61세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독립유공 대통령표창을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한신한 선생의 순고한 정신과 실천적 삶을 여기 이 비문에 기록하고 길이 후세에 귀감으로서 삼고자 한다.
" 이 공적비는 애국지사의 차남 형화의 노력으로 이루어졌으며 이 땅에 충효의 세상이 다시 태어나 결심의 광명이 올 것이다."
선생의 묘지는 대전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제5묘역 116묘역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