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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월성의거 사적비문 의리를 태산같이 무겁게 생각하고 묵숨을 홍모처럼 가벼이 여기는 이는 곧 위인이라 할것이요 한 민족과 국가의 영고성쇠는 오르지 그 민족과 국가를 구성한 민중속에 의인이 있고 없는데 달렸다 할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생생한 실례를 국세가 날로 기우러저가는 구한말및 왜정당시에 많이 찾아볼수있었고 그 뚜렸한 한가지로는 일제에 항거하는 의병의 봉기를 들지 않을수 없다. 이 의병은 전국각지에서 궐기아니한 곳이 없었으나 교남에서도 벽읍이라 할수 잇는 거창역내에서 가장 치열하였든것이다. 1905년 을사에 침략자 일제가 우리나라에 보호조약을 강행하자 남강 오일선선생은 의사 김성진 김현기 하거명 박화기등 40여명을 월성리 서당에 규합하여 도총 유격 후군 군수 등의 부서를 편성하여 월성의병이라 일컬었다. 군사본부를 김현일의 사랑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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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 월성의거 사적비문 민족과 국가에 대한 충정과 의릴 태산가이 무겁게 생각하고 목숨을 홍모처럼 가병이 여기는 이가 곧 義人이라 할것이요 한민족과 국가의 영고성쇄는 오르조 그 겨레와 나를 구성한 민족속에 의인이 있고 없는데 달렸다 할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생생한 실례를 국세가 날로 기우러져 간 구한말과 그 침통한 왜정 당시에 많이 찾아 볼 수 있고 그 가운데서도 뚜렷한 한가지로는 일제에 항쟁한 의병의 봉기를 들지 않을수 없다. 이 의병은 전국각지에서 궐기하지아니한 곳이 없었으나 삼남(교남)에서도 벽읍이라 할 거창역내에서 가장 치열하게 일어난것이다. 1905년 을사에 침략자 일제가 우리나라에 이른바 보호조약이란 것을 강해아지 대호 문언조(문현조)는 의사 김성진 김현수 하거명 박화기 등이 지역민 50여명을 월성서당 1165번지에 모여 국가정세를 토론하고 의병활동을 전개하야한다는 필연성을 인지하고 의병을 규합하니 이들 의인과 함께 도총 유격 후군 군수 감찰 정보 경리등의 부서를 편성하고 의병군을 조직하여 그 군사를 월성의병이라 일컬었다. 문어조선생은 의병본부를 김현일(현영)의 사랑채 1294번지에 차려 참모를 두고 황점에 경원택 내계에 이규현 양지에 오필선, 심동에 안진태(교태) 산수에 고에두 병곡에 신병차삼 창선에 장명국 갈계 임필희 등을 배치하여 병력을 배치하여 병력과 군수정보 등에 전투제제를 갖추었다. 유격장군 하거명은 아장군 박화기와 함께 정예병사 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