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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교민간의 풍기와 쟁소문제 등 시비를 공정하게 판정하여 명판관으로 추앙을 받았다. 또한 성재 이시영 선생과 신흥무관학교 육성에도 힘을 기우려 독립운동의 토대를 닦았다. 1914년 7월 재만 동포들의 자치기관인 부민단의 통동단총으로 임명되어 통화현 동부지역의 책임을 맡아 교포들의 생활안정을 위해 동분서주 활약하였다. 그후 부민단은 부민회로 확충 개편되니 선생은 검무감으로 피선되어 교민간에 일어나는 쟁론과 소송문제를 해결하는데 진력하였다. 3.1운동 이후 남만주 각지에 산재한 자치기관이 단합의 필요를 느껴 1919년 4월 부민회를 개편하여 독립운동의 총본영으로 군정부를 조직하고 교포들의 자치기관으로 한족회를 발족하니 선생은 그 검찰부장으로 피선되어 교포사회의 질서 유지에 주력하였다. 군정부는 임시정부의 요청으로 그 통할 아래 들어가게 되어 서로군정서로 개편되니 선생은 중앙의회의 회장으로 피선되어 독립군 양성에 전력을 기우렸다. 1919년 6월 임시정부의 대의원이 되었고 1920년 이후는 독립투사의 유족을 구출하는 총책임자로 상해에서 활동하던 중 1923년 피검되어 일본영사관 감옥에서 2년간 옥고를 겪으셨다. 출옥 후 1925년 1월 만주로 돌아와 통합된 독립운동 단체로 발족한 정의부의 검무감으로 임명되어 교민의 사법행정에 공헌하였다. 1928년 7월 선생은 길림성을 중심으로 반일구국회를 결성하여 항일운동을 계속하는 한편 동포들의 생계를 위하여 미개지를 개척하고 농장을 경영하였으며 임시정부 재정조성 책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중국에서의 항일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됨에 따라 선생은 반일군을 조직하고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1937년 재차 일본 헌병에게 피검되어 신의주 감옥에서 8년간 복역하고 조국광복과 더불어 출옥하였다. 1945년 10월 환국하여 광복군 고문에 추대되었고 이듬해 3월에는 건국협성회 회장 6월에는 중앙애국노인회 조직부장 10월에는 대동청년단 정치고문 1947년 6월에는 한국독립당 감찰위원장 등을 역임하여 건국사업에 진력하시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반민특위 충북위원장 1949년 10월 대한민국 감찰위원회 수석위원으로 신정을 바로잡는데 공이 컸다. 1951년 향년 71세로 서거하니 군민장으로 고향땅 대율리에 안장되었고 군민의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