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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암 김재계 선생은 1888년 4월 25일 현 장흥군 회진면 신상리에서 동학농민혁명군 규현(圭炫)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은 1906년 동학의 후예인 천도교가 종교의 자유를 획득하자 19세에 살아남은 장흥 동학농민혁명군 9명과 함께 천도교 장흥교구 임원이 되었다. 선생은 1919년 천도교 장흥교구장으로 선출되어 초가였던 교당 자리에 1918년 현 지방문화재인 천도교 장흥교당을 와당으로 신축하여 명실공히 장흥 독립운동의 산실로 만들었다. 천도교 중앙 충부에서 3.1독립운동 거사 자금을 모금할 때 교당건립 모금이라 하여 경찰 눈을 피해 독립자금을 모금하여 여성교도 2명을 시켜 자금을 서울로 보냈다. 독립선언문이 장흥에 전달되자 3월 15일 대덕 장날 만세운동을 전개하여 50여명이 체포되어 나주 헌병대로 압송된 후 그 중 17명이 기소되어 선생은 광주에서 3년의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석방된 후 1921년까지 장흥교구장을 역임하면서 고향 덕보에 현 명덕초등학교 전신인 양영학원도 설립했다. 1924년부터는 천도교 중앙홍부에서 감사관정 신도관정 금융관장 종법사 공선관장 등 각종 간부직으로 활동하면서 신간회 창립 때는 천도교 대표로 활동하였다. 1926년부터 1936년까지 천도교 월회보 편집위원이 되어 천도교 교리 종교사 논설 등을 게재한 원고가 족히 단행본으로 1권 분량이 넘는다. 선생은 1938년에 동학농민혁명 3.1만세운동과 더불어 천도교 3대 항일운동인 무인멸왜기도운동의 주축이 되었다. 전국적으로 멸왜기도운동을 시작한 지 보름 만세 황해도 신천경찰서에 발각되어 총독부 경무국의 지휘하에 황해도 경찰국의 주도로 전국적인 수사가 진행되어 독립자금 모금까지 발각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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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과 대질 신문한다고 장흥 천도교 간부 2명을 황해도로 연행해 갔다. 일제가 이 사건을 조사할 때는 3.1운동보다 더한 대음모라고 각본을 꾸몄지만 중일전쟁 수행에 민심이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70여일 만에 병보석으로 석방하였다. 선생은 석방후 고향으로 내려와 1년여 휴양하다가 춘암 대도주의 부름을 받아 상경한 후 다시 독립운동을 재개하려 했으나 고문 후유증이 재발하여 1942년 6월 27일 종로구 옥인동 자택에서 향년 55세로 순국하였다.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50년대 후손들이 고향으로 이장했다. 1976년 독립유공자 대통령표창을 수여 받자 장흥군의 주도로 1977년 4월 22일 현 장소로 재 이장하여 성역화하였다. 1991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우리 장흥 군민은 선생의 숭고한 뜻을 추모하면서 의향장성 기개를 지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