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號 : 華史 황해 송화(松禾) 사람이다. 전통적 유가(儒家)에서 생장한 그는 1905년경 상경하여 박은식(朴殷植)·양기탁(梁起鐸)의 언론사업에 종사하였고 그후 평양의 대성학교(大成學校)와 숭실전문학교(崇實專門學校)에서 수학하였다. 그러던 중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중국으로 망명하여 북경(北京)의 회문대학(匯文大學)과 명륜대학(明倫大學)에서 수학하였고, 절강성(浙江省) 항주부(杭州府) 군관학교 속성과(軍官學校速成科)를 수료한 후 1913년 국민당(國民黨)의 제2차혁명(辛亥革命)에 참가하였다. 그 뒤 그는 중국을 떠나 유럽과 하와이를 여행하고 1914년 귀국하여 해주(海州)에서 유림계(儒林界)의 이종문(李種文)·오순원(吳淳元) 등과 밀의하여 항일격문을 작성·배포하였다. 그리고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신규식(申圭植)이 주도한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였으며, 1916년에는 고향의 가재(家財)를 매각하여 만주 안동(安東)에 삼달양행(三達洋行), 장춘(長春)에 상원양행(尙元洋行)을 설립하면서, 박상진(朴尙鎭)이 주도한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가입하여 대외업무를 맡았다. 그는 신흥학교(新興學校)의 이시영(李始榮)에게 자금을 조달하는 한편 박상진과 함께 무기확보에 힘을 쏟았으며, 총독암살을 계획하고 회원 성낙규(成樂奎)·조선환(曺善煥)을 서울에 잠입시켰다. 1917년에는 귀국하여 대한광복회의 황해도 책임자로 활동하면서 유림출신 인사들을 동회에 가입시키며 조직확대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던 중 1918년초 동회의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옥고를 치렀다. 광복후에는 대한무관학교(大韓武官學校) 최고고문, 국민협의회(國民協議會) 회장 등을 지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