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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러시아인 사바찐이 바라본 을미사변 39 을 예상했다. 그래서 그는 베베르의 추궁과 힐책에 도 끝까지 침묵했다. 외교 사료와 재판 기록 등에 나타난 사바찐의 행 적을 추적해 보면 사바찐은 왕비가 암살될 시각인 5 시 50분 전후 현장을 목격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사건 현장에서 사바찐과 오카모토는 어떤 합의를 했을까? 그것은 사바찐의 생명을 구해주는 대신에 오카모토를 비롯한 일본자객의 폭력과 살해에 대한 침묵을 지켜주는 조건이었다. 사바찐은 을미사변에 관한 자신의 보고서에서 오카모토를 ‘매우 고상한 외모’, ‘단정한 양복 차림’, ‘당신과 같은 신사’ 등으 로 폭도가 아닌 신사로 묘사했다. 결국 사바찐은 자 신의 보고서에서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오카모토의 이름을 끝까지 언급하지 않았고, 왕비를 비롯한 궁 녀의 살해를 증언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바찐은 베베르와의 불편한 관계 속에서 더 이상 러시아공사관이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없다 고 판단했다. 사바찐은 자신의 보고서에서 과거 자 신에 대한 공사관의 부당한 태도를 언급하면서 베베 르의 행위를 간접적으로 비난했다. 사바찐은, 공사 관이 자신에게 적당한 직장을 소개할 수 없다는 통 고 내용 및 러시아공사관 건축에 관여한 자신에게 인건비 7%를 공사관이 지불하지 않았던 사실도 기 록했다. 신경이 더욱 예민해진 사바찐은 이러다가 암살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사로잡혔다(АВПРИ. Ф.150.Оп.493.Д.6.Л.129об). 사바찐은 을미사변 조사를 위한 특별위원회의 심리를 피하고, 베베르와 의 불편한 관계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조선을 떠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판단했다. 얼마 후 사 건이 잠잠해 지면 조선으 로 돌아올지 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청 국에서의 생 활이 과연 여 기보다 나을 지 어떨지, 그것도 그에 게는 확실하 지 않았다. 사바찐이 도피를 갈망한 것은, 다만 살고 싶다는 한 가지 소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바찐은 제물포에서 포함 까레이쯔(Кореец)를 타고 10월 23일 중국 산동반도의 즈프(芝罘 )에 도착 했다. 사바찐은 즈프의 시웨(シ―ヴエ―, 玺悦) 호텔 에 머물면서 러시아 부영사 찜첸꼬 이외에는 아무도 사바찐이 직접 그린 을미사변 당시 상황과 경 복궁 전도(필자 제공) 19세기 말~20세기 초의 러시아공사관(가운데 위)과 주변 모습(나무 위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