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page

Special Theme • 경북지역 후기 의병의 봉기와 일본군의 탄압 39 1905년 11월 을사늑약 이후 각처에 서 일어난 의병부대의 최종 목표는  서울진공이었다. 1906년 3월 창의 한 산남의진(山南義陣)에서 정환직· 정용기 부자는 서울진공작전 참여를  목표로 활동했다. 경북지역에서도 기 존 의병부대에 해산군인들이 편입됨 으로써 전술과 무기가 향상되고 강화 되었다. 1908년 10월부터 12월까지  대규모 의병부대를 이끌던 이강년·신 돌석·정환직 의병장이 잇달아 순국하 였다. 이후 예하 부대장들은 잔여 의 병을 이끌고 대일항전을 이어갔다.  일본군은 경북 북부지역에서 유격전 을 벌이고 있던 김상태 · 정경태 · 최성 천 · 윤국범 등의 의병을 진압키 위해  1910년 11월부터 12월 20일에 걸쳐  ‘대토벌작전’을 벌였다. 조선 파견 보 병 제1연대 3대대 장교 이하 399명 과 헌병 · 경찰 145명을 동원하는 연 합토벌작전이었다. 후기 의병의 창의와 목표 ➊ 을사늑약 이후 의병이 일어나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해 강제로 맺 은 제2차 한일협약, 소위 ‘을사늑약’은 전 국민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 었다. 대다수 국민은 이 조약으로 말미암아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고 생 각했다. 이미 1904년 2월 23일 제1차 한일협약, 소위 한일의정서가 체결되 면서 의병의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05년 8월 관동지방의 원 주에서 원용팔, 9월 충북 단양에서 정운경이 창의(倡義)했다. 그리고 소 위 ‘을사늑약’ 이후에는 전국적으로 확산하였다. 원용팔과 정운경의 의병부대는 1905년 10월경 소백산을 넘어 경북 예천으로 들어와 경북 북부지역의 봉화 · 풍기 · 순흥 등지를 전전하며 의 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곧이어 경북 각처에서 소규모의 의병진이 결성 되었다. 영주에서는 손기영이 창의하여 함창 태봉의 일본군 병참부대를 공략 했고, 봉화에서는 1905년 11월 이춘양이 창의하여 예안·안동·영양·봉화· 울진 등지에서 활동했다. 그리고 의성에서는 박연백이 창의하여 의성·의 흥·영천·청송 등지에서 활동했다. 그 밖에 영양 출신의 이현규는 1906년 11월 김대규와 함께 창의하여 영양 · 청송 · 울진 · 진보 일원에서 활동했고, 안동 출신의 유시연은 청송·영양·영덕·영해 등지에서 활동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영덕 출신의 신돌석과 영천 출신의 정환직 · 정용 기 부자의 창의이다. 신돌석은 1906년 음력 3월 13일 영해에서 영릉 의진을 조직하고 경북과 강원도에 걸치는 동해안 일원의 영해 · 영덕 · 평 해 · 영양 · 봉화 · 안동 · 청송과 울진 · 삼척 등지에서 불굴의 항전을 벌였다. 정환직과 정용기 부자는 1906년 3월 영천에서 산남의진을 결성하고 영천·청송·경주·영일 · 의성 등지에서 활동했다. 그 외 전기의병에서 창의했던 영양 출신의 벽산 김도현은 1905년 9 월 창의했다가 실패하였고, 다시 1906년 1월 포군 50~60명을 이끌고 일어났다. 그러나 안동진위대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는 등 수난을 당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