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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운동기념비(장안면) -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 관리번호 : 13-1-07 / ● 관리자 : 화성시장(장안면장) / ● 건립일 : 1974.3.1. / ● 건립취지 : 3.1운동 당시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장안면 수촌마을 지사들과 이를 도운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의 고귀한 정신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 기미년 3월 1일 독립운동의 불길은 수촌마을에도 번지었다. 이 마을 사람들은 밤새워 만든 태극기를 휘날리며 동네 밖을 나섰다. 때맞춰 석포리와 삼괴반도 방면에서 밀어 닥친 주민들과 합세하여 장안·우정면사무소를 차례로 점거하고 서류를 모조리 불태웠다. 이들은 쌍봉산에 올라 드높이 만세를 부른 후 화수리 경찰관 주재소로 이동, 왜경에게 항복을 요구하며 대한독립을 선언하니 이에 당황한 인본인 순사 부장은 군중에게 마구 총질을 하다 맞아 죽었다. 보복의 앙심을 품은 다수 병사를 동원하여 4월 15일 이른 새벽에 이 마을을 급습하여 교회당과 가가호호에 불을 질렀다. 불의의 변을 당한 마을 사람들은 황급히 뛰어나가 불을 끄려했으나 대기했던 일헌병들의 총칼을 맞아 많이 죽거나 다쳤다. 마흔 두 집 중 네 집만 남은 채 온 마을은 비명소리와 함께 잿더미가 되었다. 그 무렵 참변을 듣고 달려온 한 외국인이 있었으니 그는 호랑이 석호필이란 우리말 이름의 캐나다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였다. 그는 1916년 선교사로 한국에 왔다가 3···1만세운동 때 죽거나 다친 많은 학생들과 시민들을 구호하였으며, 부상당한 분들을 위문하고 불편한 몸을 이끌고 서울까지 여러 번 왕래하며 부상자 입원가료에 온갖 정성을 다했다. 또한 서대문과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남녀애국청년들을 찾아가 위문하는 와중에도 동분서주하며 세계만방에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였다. 한편 호랑이 석호필은 1920년 국외로 추방 당했으나, "끌 수 없는 불꽃"이란 책을 써서 한민족의 의거를 세계만방에 알리었다. 그는 우리 정부의 초빙으로 1958년 다시 한국으로 와, 1960년 문화훈장, 1968년 건국공로훈장을 받았다. 1969년 한국에 영구 정착, 1970년 4월 12일 82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는데, 그의 평생 소원은 한국땅에 묻히는 일이었다고 한다. 이에 정부는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에 사회장으로 만장하였다. 이는 외국인으로서는 최초의 국립묘지 안장이었다. (추모시)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인생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고 하더니 여기 마을 사람들은 호랑이와 의좋게 오래오래 살며 길길이 낙원 이루리라. ★ 전면의 “3·1獨立運動紀念碑(3·1독립운동기념비)”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