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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민족의 수난 6.25. 여기 이 고을에도 피어린 역사가 있었다. 이 터전에서 무고하게 산화하신 분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선현들의 영혼을 달래고자 이 탑을 세워 향화를 올립니다. 때는 1950년 6월 25일 새벽 3시 북한 인민군은 무력남침을 강행했다. 그들은 7월 23일 새벽 아무런 저항없이 여기 장성까지 무혈입성하자 지역 용공분자 좌익청년들은 어깨에 완장을 두르고 거리를 누비며 인민군을 환영하는 등 하룻밤사이 세상은 바뀌었다. 그 들은 장성경찰서를 내무서로 이용하고 각 주요기관을 점거해 정치보위부, 노동당, 인민재판소, 유격대, 조국보위후원회, 등을 설치한 후 허사령을 위시한 행동대를 조직 바로 우익진영 반동분자를 색출하여 자수를 권유하고 인민재판에 회부하여 공식적이거나 비 공식적으로 밤마다 사람이 사라지곤 했다. 이에 분개하여 당시 청년단장 변진일은 마을청년들을 중심으로 태극결사대를 조직 항거 대책을 세우고 외부지역까지 조직을 확대하던 중 사실이 누설돼 온갖 고문을 당하고 희생이 많았다. 마침 그때 10월 26일 대한민국 국군이 장성 못재까지 진격해왔고 그날 18시경에는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장안리 마을주민 50~60여명은 사정으로 모두 모였고 불안한 마음에 웅성거리고 있었다. 이떄 후퇴하던 인민 유격대들이 사정에 있던 사람들을 포위하고 반동분자를 색출하여 총도 아닌 대창 또는 괭이 등으로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이날 희생자만 어린이 포함 19명이고 이전 사상 자까지 총 38명이 억울한 죽임을 당하였다. 1951년 4월 마을대표 변경연은 지역주민 유족등의 모금으로 희생자를 넋을 기리는 충혼탑을 세우고 매년 유족들의 주관하에 제를 올려 영혼을 달랬다. 이후 본 탑은 오랜 세월이 흘러 마모되고 퇴색되어 2010년 2월 보훈청과 장성군의 지원으로 복원하여 숭고한 애국심을 기리며 원통한 죽음을 애도하다. 2010년 3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