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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생명으로써 보배를 삼는 것이 아니요. 진실로 의기로써 보배를 삼는 것이라. 족히 생명을 버리면서도 굳이 그 의기를 살리는 것이니 그러므로 범상한 사람은 일신의 작은 영행만을 탐하지마는 영명한 사람은 오직 대의에 살고 대의에 죽어 그 이름을 천추에 전하는 것이다. 여기 일생을 조국 수호의 제단에 바친 의병장 남일 심공은 본관이 청송이요. 려말의 절신 둔재 계년의 후예요. 둔운처사 의봉의 장남으로서 고종 6년 을사 서기 1869년 2월 15일에 전남 함평군 월야면 산정리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천성이 총민하고 재질이 뛰어난 위에 성경과 현전을 배워 충효의 뜻을 깨달아 자기의 갈 길을 정하고 병서와 역학을 읽어 무술의 묘법을 익힘으로써 내일의 국난에 시비하더니 을미년 서기 1895년 일본의 손에 국모가 살해된 뒤 의병운동이 일어났을 때 공은 27세의 청년으로서 비분한 뜻을 참지 못했고 10년이 지난 뒤 이른바 을사매국조약이 체결되자 공은 산업을 폐하고서 오직 왜적을 내쫒고 국권을 되찾기 위한 경론에만 몰두하더니 다시 2년뒤에 정미년에 고종의 폐위와 함께 군대마저 해산되므로 공은 비로소 의병을 일으켜 함평군 신광산중에서 훈련을 거듭하며 각도에 격문을 전하고 왜적을 따르는 빈이배들에게 경유문을 뿌리자 수월동안에 각처로부터 모여든 이병들이 무릇 56백명을 넘었다. 이듬해 무신년 40세되던 해 3월 제1차 강진 오치전투에서 왜적 수십급을 목베고 그로부터 무릇 3년 동안에 전후 15회를 싸웠는데 장흥 곽암과 신풍과 남평 장담원과 거성동과 능주 노구두와 석정과 풍치와 영암 사촌과 나주 반치와 해남 성내와 보성 웅치와 천동 등에서 왜적의 날카롭고 수많은 군대와 마주 싸우며 어느 때는 기이한 계책으로써 또 어느 때는 무서운 담략으로 오직 전승무패한 의병장이요 엄격한 규율 중에서도 언제나 부하와 함께 감고를 같이 했으며 민중을 사랑하고 어루만지므로 누구나 공을 따르지 않는 이가 없었건마는 때는 이미 다되어 쓸어지는 나라를 떠받들 길이 없고 의병해산의 조서까지 내려 사기마저 꺽이므로 공은 앙천호곡하기를 말지 못했었다. 그리다 기유년 8월 26일에 능주 풍치에서 적에게 잡혀 광주감옥에 갇혔으되 왜장을 꾸짖는 늠름한 자세는 자못 태산에 비길만 했고 그해 12월에 대구로 이송되어 왜의 법정에도 대의를 들어 웅변하고 온갓 고난에도 굽히지 않은 기백은 참으로 열일에 견줄만 했으며 마침내 경술년 서기 1910년 2월에 적의 교수대에서 향년 42세로써 태연자약하게 순국하신 완전한 시사여귀의 모습이라. 우리는 오늘 여기 공의 뜻과 행적을 돌에 새겨 길이 전하고 자주독립 노선으로써 우리 민족의 갈 길을 삼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