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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액완하여 통분을 참지 못하였고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울려퍼진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전국으로 메아리치자 흔연 용약하여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몸 바치기로 맹세하였다. 의창군 진전면 양촌의 변상태가 국권 회복 중앙총부로부터 서부 경남 일원의 의거 책임을 지고 3월 중순초 군북면 사촌의 조용태의 집에 이르르매 청년들은 뜻을 같이 하여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각 리동에 배분하고 연락을 긴밀히 하였다. 3월 19일의 함안 의거 다음날인 20일은 군북 장날이다. 이날 군중들은 사방에서 모여들었고 비장한 공기는 시내에 깔려있었다. 3천여 군중이 참집한 가운데 독립 선언식은 엄수되었으며 독립만세의 함성은 산하를 진동시켰고 태극기는 바람에 휘날리어 물결쳤다. 이어 군중은 시가를 누벼 시위 행진하는데 공은 행렬의 선두에서 태극기를 뒤흔들었다. 대기가 한 번 흔들리면 만세의 소리는 더욱 드높았다. 행렬이 순사주재소 앞에 이르자 군중들은 이를 탈취하려고 조수와도 같이 멀어닥쳤다. 용력이 출중하고 민첩한 공은 주재소 정문을 파괴하고 뛰어드니 일경이 총을 난사하여 공은 복부 관통으로 쓰러지니 향년 24 미혼의 몸이었다. 공의 제적부에는 '3월 2일 오후 2시 군북면 중암리에서 사망"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49번지가 바로 주재소의 자리다. 그날 밤 종제 성업이 공의 시신을 수습하여 공동묘지에 모셨다. 1977년 공의 의열을 기려 대통령이 표창하였고 순의한 지 64년이 되는 금년에 애국지사 묘역 정화사업비로 오곡리의 대로변에 묘소를 이장하고 이 비를 세워 공의 뜻을 현창하다. 아아 공은 오직 하나뿐인 목숨을 하나뿐인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피어나지 못한 꽃봉오리채 바쳐 삼천리강산에 무궁화 연연하게 피어오르게 하였으니 뉘라서 흠모하지 않으랴. 찬탄하지 않으랴. 아아 공이시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