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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다양한 의약품의 수입 판매, 피부연고제 안티푸라민을 비롯, 값싸고 질 좋은 신상품들을 개발 공급하면서, 국민들의 건강한 일상을 실현하셨다. 서울 종로구 신문로에 회사 사옥과 자택을 짓고, 종일 회사 일에만 매진하는 열정적인 기업가의 모습을 보여주시니 사세가 번창하였고, 일제에는 경제적으로 항거하면서 일본 기업과의 경쟁에서도 당당히 승리하며 우리 민족기업의 기개를 드높이니, 그 공적들이 지대하다.
<b>반평생을 독립투쟁에 몸바친 애국지사</b>
公께서는 개인적으로 비밀리에 항일운동도 적극 해오셨으나,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일제강점 후기에, 美 국적자의 추방조치로 국내 독립운동이 어려워지자, 1938년 동생에게 회사를 맡기고 재차 도미하여 두 번째의 재미 독립운동을 하시게 되었다. 당시 가족과 지내기보다는, 미국 전역을 돌며 다방면으로 국제사회에 항일 홍보활동을 하셨다. 다양한 국제 인사들과 교류하며 함께 민족 잡지 발간, 국제 언론계 논평 등과, 경영학 석사 학업까지 바쁜 재미 독립활동가로서 지내셨다. 전쟁 후반, 미국 정부 OSS에 의해 한반도에 특전부대 침투 군사작전인 냅코작전 요원으로서, 50세 나이로 핵심리더인 제1조 조장을 맡았으며, 특수군사 훈련도 받았다. 그 작전은 일본의 조기 항복으로 비록 실행은 못했지만, 독립전사로서 참여함은 국가기밀유지 기간 후에 뒤늦게 세상에 알려진바, 너무나 훌륭하신 독립운동가로서의 공적을 더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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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직후 公께서는 한국경제와 산업발전을 위한 정책연구에 집중하셨는데, 미국에서 고려경제연구회를 조직하여 조국의 근대화 방안을 연구하셨다. 이를 마치고 1946년 귀국하게 되자, 이승만 정부가 초대 상공부장관 직을 제의하였지만 정치에의 개입은 일체 사양하고, 기업활동과 순수 연구에만 매진 하겠다는 신념을 지켰다.
<b>선진경영 모델을 완성시킨 위대한 경영철학자이며 교육자</b>
유한양행은 1936년 주식회사 체제를 확립하고, 창업주 지분 52%를 사원들에게 무상배부하여 1939년 국내 최초로 종업원 지주제를 실현하였다. 公께서는 1951년 코리안모터스社를 설립하여, 크라이슬러 자동차 부품을 수입, 조립 생산하는 국내 최초의 자동차 제조업을 하셨는데, 이에 필요한 기술자 양성을 위해 1952년 고려공과기술학원의 설립 운영 및 1964년 유한공고를 개교 운영하신바, 선구적 교육자의 길도 걸으셨다.
公께서는 1962년 유한양행을 제약업계 최초로 상장하였고, 개인 주식을 연세대학교를 비롯 여러 사회단체에 기부 및 많은 사회 복지적 활동과 지원을하셨다. 이는 당시에 보기 드문 선진 활동으로, 우리 기업사 최초의 사회적 책임 거버넌스를 실현한 것으로서, 이런 바탕으로 모든 유한 계열사들은 현재까지도 이 부분의 단연 국내 최고의 모범 사례를 이어오고 있다. 1971년 77세로 생을 다하심에 자손들에게 극소의 재물만 유산으로 남기고, 모든 재산은 사회에 기부하고, 경영권은 전문경영인에게 물려주는 등, 마지막까지도 우리 재계의 기업 경영사에서 둘도 없는 선진 경영철학을 이룩하시니, 이 모든 공로에 대해 정부의 국민훈장과 2개 건국훈장이 수여되었다.
이에 우리 유일한 家門은 公의 훌륭하신 그 공덕을 높이 기리 고자 이 자리에 碑를 세워, 후대에게 귀감으로써 지역사회와 전 국민들에게도 告하는 바이다.
柳承欽 謹書(前연세대 교수 보건대학원장, 長 조카) 晉州柳氏 宰臣公派宗中謹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