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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2024년 4월 Special Theme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5주년 특집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움직인 지도자들’  하였다. ‘임시정부의 영원한 주석’으로 김구의 시대 가 열린 것이다. 주석으로 1941년 12월 8일 일제의 진주만 공습으 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12월 10일 대일선전포고 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대일항전에 나섰다. 김구 주석이 이룬 최대의 외교성과는 카이로선언에서의 ‘한국 독립의 보장’을 받아낸 것이다. 김구 주석이 카 이로회담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것은 1943년 7월이 었다. 미 · 영의 수뇌와 함께 장개석 총통도 카이로회 담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김구 주석은 7월 26일 외무부장 조소앙, 선전부장 김규식, 광복군 총사령 이청천과 부사령 김원봉, 통 역 안원생을 대동하고 장개석(蔣介石)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김구 주석을 비롯한 요인들은 한국의 독립 을 힘써 달라고 요구하여 장개석으로부터 ‘힘써 싸 우겠다(力爭)’는 약속을 받아냈다. 카이로회담은 1943년 11월 22일부터 26일까지 열렸다. 장개석은 영수회담에서 루스벨트 미국 대통 령과 처칠 영국 수상에게 전후 한국의 독립을 약속 하자는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즉각 결정하여 발표 하자고 제안하였다.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한 언약을 그대로 지킨 것이다. 그리하여 1943년 12월 1일 ‘일 제 패망 이후 한국을 자유 독립국으로 한다’는 카이 로선언이 발표되었다. 이로써 한국은 제2차 세계대 전 시기 연합국 열강으로부터 독립을 국제적으로 보 장 받은 유일한 아시아국가가 된 것이다. 임시정부는 1944년 4월 단일 주석제 지도체제를 주석 · 부주석제 지도체제로 헌법을 개정하였다. 좌 우 연합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리하여 주석에는 김구, 부주석에는 좌파 민족지도자 김규식 이 선출되고, 조선민족혁명당을 비롯한 좌파 정당의 인사들도 정부 각료로 임명되었다. 좌우 민족세력의 통합으로 연합정부 체제를 갖추어 광복을 준비하고, 그 이후까지를 대비하려는 것이었다. 카이로회담 당시 연합국 수뇌. 앞줄 왼쪽부터 장개석 · 루스벨트 · 처칠, 장개석 부인 송미령 카이로선언문의 한국 독립 언급 부분(밑줄  부 분, 이상 연합뉴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