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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編 순국열사 및 독립운동가 • 39 6. 거성은 떨어지고 백발이 성성한 노구의 몸으로 머나먼 이국땅 만주벌판에서 오로지 조국광복의 그날을 고대하떤서 독립운동에 동분서주하던 회-남은 1922년 4월 2일 일제의 앞잡이 김헌(金;많훤)씨 게 피실되어 순국하였다. 참으로 민족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화남의 일관된 우국우도(팔國쭉道)의 정신과 항일공적은 부인할 수 없는 명명백백한 사 실로 근대 한국민족운동사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많은 생애를 민-주에서 마친 화남의 시신(昆身)은 몰래 매장되 었는 데, 다시 아들 병항과 그의 처남 이희재와 화남 동지의 아들 정하은 세 사람이 만주 천녕 현 백기자촌 앙방하 남산에다 밤중에 암장하였다. 그러나 당시 만주에서 이 사실을 알고 해방 후 1945년 11월 부친(병항)과 귀국한 박정훈 씨는 솟구쳐 오르는 오열을 억제하면서 「내 생전에 조부님의 유해를 조국 땅으로 안장하는 것이 소망인데, 불가능하게 됐다」 며 울음을 터뜨렸다 1962년 3월 1일에 국가에서는 건국공로훈장 단장(제54호)을 추서하였다. 화남의 유물이 나 문적도 몰래 묻었으나 도굴당하고 찾을 길이 없다. 정훈 씨가 귀국 당시에 가지고 온 것은 화남이 보존하였던 초섭(楚燮)의 초상화 두점(흑백 유색) , 화님의 초성화 한점, 화남 이 써놓은 가승, 화서아언 한권, 경서와 기타가 있다. 그리고 화남의 일기 일부가 춘천에서 유실되었다는 유연익 씨의 말이 있다. 출생지 인 가평 군 북면이 거주지였고 의병을 일으컸던 홍천군 서석띤에서도 1988년 필자 가 조사한 바로는 화남 박장호는 생소한 사람이었다 더 욱 개탄할 일은 본손(本孫)도 아닌 사람이 화남의 후손으로 보훈처에 등록하여 독렴운 동가 유족이 돼서 수혜한 사실이다 이 사건으로 화남의 외아들 박병항(필보)의 아들이요 화남의 품안에서 자란 장손자 정훈 씨는 1975년부터 당국에 시정을 촉구하고 있으나 15년 이 지 나도록 등록을 못하고 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의롭게 살다가 의롭게 죽은 선열(先烈)들의 위업이 묻혀 버리고 후 세(後 世)에 길이 전하지 못하여 세인(世人)의 귀감이 되지 못한다면 이는 우리의 도리가 아니다. 만약 이를 무심코 넘겨버린다면 장차 누가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충성 하라고 가르 칠 것 이며 국가와 민족이 어려운 국면에 처하여 있을 때에 어 떻게 충성을 당부할 것 이며 T가 솔선하여 기의(i않義)하는 자가 있겠는가 이래서야 어찌 윤상(倫常)이 보전되고 강토 가 지켜지며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바라겠는가. 그리고 순국선열의 공적을 도용해서 명리(名利)를 채운다면 이는 하늘과 영령 이 노여워 할 일이요 후손과 만인(萬Á)이 성토할 일이다. 또한 후손이 후손대접을 받지 못하거 나 불명 예스러운 일이 있다면 이는 선열을 욕되게 하는 일이다 따라서 박정훈 씨의 유공자 후손 등록이 당국에 의해 결론이 내려지고, 화남 박장호 도 총재의 기념비 건립 등 추모사업도 지원해야 할 것 이며 항일활동의 공적과 순국을 높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