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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논산(論山) 사람이다. 구한말에 공주(公州)군수를 역임하였으며,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국권이 침탈되자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만주로 망명한 후 유하현 삼원보 서구(柳河縣三源堡西溝)에서 박장호(朴長浩) 등과 함께 교육사업에 전념하여 젊은이들에게 항일민족의식을 심어주었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난 후 박장호(朴長浩)·조맹선(趙孟善)·백삼규(白三圭)·전덕원(全德元) 등이 중심이 되어 남만주 유하현(柳河縣)에 대한독립단을 조직하자 여기에 가담하여 교통부장으로서 항일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20년에는 광복군사령부 선전부장, 정보국장 등으로 항일투쟁을 하였다. 1921년에는 상해로 가서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으며 태평양회의가 열리자 홍 진(洪震)·신익희(申翼熙) 등 25명과 함께 한국독립 청원서에 서명하여 제출하고, 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를 조직하여 그 재무간사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동년 6월 7일에는 국민대표회 기성위원회의 집행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1922년 6월 9일에는 임시정부 대통령 및 국무위원의 무능을 들어 오영선(吳永善)·안정근(安定根)·조상섭(趙尙燮)·차이석(車利錫) 등과 함께 불신임안(不信任案)을 제안하여 동년 6월 17일 제10회 의정원회의에서 가결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22년 상해에서 김 구(金九)등 6인과 함께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조직하였는데 이는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독립군의 양성과 군비의 마련을 목적으로 한 단체였다. 그는 1922년 10월 28일 노병회 발기총회에 참여하여 기초위원을 선임하기도 하였다. 이후 상해에서의 기록은 발견할 수 없으나 1924년 6월 5일 회비체납으로 노병회 회원자격을 상실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924년에는 이미 만주로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1924년 8월에는 통화현(通化縣)에서 임시정부 직속의 통일군정부인 참의부(參議府)를 조직하였는데, 김승학(金承學)·이유필(李裕弼)·윤세용(尹世茸) 등과 협력하였다. 1927년에는 참의부 제3행정구 위원장과 교육위원장에 임명되어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1930년을 전후해서 조선혁명당에 참여하여 현익철(玄益哲)·양세봉(梁世奉)·고이허(高而虛) 등과 함께 혁명군을 조직하여 무장항일투쟁을 지휘하였으며, 1931년 12월 17일에는 신빈현하북(新賓縣河北)에 있는 서세명(徐世明)의 집에서 혁명당 간부 30여명이 모여 긴급중대회의를 개최하였는데, 그는 정치부장에 선출되었으나, 일경에 노출되어 습격을 받고 피신하였다. 그는 양세봉, 고이허와 함께 남만에서의 마지막 무장항일투쟁의 역사를 장식한 지도자였으나, 1932년 2월 관전현(寬甸縣)에 주둔하고 있다가, 일·만 군경대의 불의의 습격을 받고 혈전 끝에 수십명의 부하들과 함께 장렬히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