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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은구장(仕隱舊庄) 이원영(李源永) 목사 생가 / 안동시 보존문화유산 49호
이 집은 조선 정조때 형조참판을 지낸 사은(仕隱) 이귀운(李龜雲, 1744~1823)의 집으로, 아호를 따라서 사은구장(仕隱舊庄)이라 부른다. 그는 퇴계선생의 8대손이자 원대처사 이구(李榘)의 현손이다. 문과로 벼슬길에 나아가 내직으로 삼사(三司)의 요직을 두루거쳐 대사간, 형조참판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영해부사, 양산군수를 지내면서 출처의 올바름, 의리의 엄격함, 백성의 구휼, 지성스럽고 간절한 애군우국, 의리와 신의로써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았으며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지조를 지켰다. 또한 이름을 '벼슬길에서 숨긴다'는 뜻으로 아호를 '사은(仕隱)'이라 하였다.
이 집은 독립운동가 봉경(鳳卿) 이원영(李源永, 1886~1958) 목사의 생가로서 아버지는 사은 이귀운의 5대 주손인 이관호(李觀鎬)와 어머니(金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성장한 곳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하여 15세에 사서오경을 통독하고, 20대엔 신식교육기관인 봉성측량강습소, 보문의숙에서 투철한 민족교육과 신교육을 받은 혁심유림이었다. 1919년 예안 3.1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피체되었고, 서대문 형무소 수감중에 이상동 장로의 전도로 기독교에 입신하였다. 1930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신세교회(현 동부교회), 안기교회(현 안동서부교회) 등에서 목회를 사역하였다. 일제암흑기 창씨개명, 신사참배 거부로 목사직 시무사면을 당했으며 8.15광복까지 황민화정책거부로 4차례나 구금 되었다. 1945년 광복 후 출감하여 경안노회를 복구하여 안동서부교회를 재건하고, 경안고등성경학교(현 경안신학원)를 설립하여 교역자 양성에 힘을 쏟았다. 1954년에는 제39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 추대되어 신사참배 취소성명을 발표하였다. 1958년 6월 21일 72세의 일기로 영면하니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고,1999년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 제2묘역에 이장되었다. 이원영 목사의 생애는 애국지사요 참된 교육자요 사랑의 목회자요 산 순교자로써 고난을 영광으로 승화시킨 아름다운 자취를 남긴 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