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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2 세웠음. 안내판 설명 [한글] 백조일손지지 이곳은 1950년대 모슬포 경찰서 관내(현재 한림읍, 대정읍, 한경면, 안덕면)에 거주하던 순박한 농민, 마을유지, 교육자, 공무원, 청년 단체장, 학생 등을 6.25전쟁이 발발하자 군,경의 자의적 판단에 근거하여 구금 되었던 양민이 사법적 절차 없이 정부군에 의하여 무참히 학살당한 일백 서른 두위의 영혼이 영면 하신 곳입니다. 예비검속은 비극의 씨앗 1950년 6월25일 북한 공산군이 남침하자 내무부 치안국에서는 당일 14:00시 요시찰인 전원을 구금할 것을 전국 경찰서에 지시함에 따라 제주도 전역에서는 1,200여명을 예비검속 하였는데 그중 모슬포 경찰서 관내에서는 347명을 검속, 모슬포 절간고구마창고와 한림 어업창고, 각지서 등에 분산 구금하였음.(근거: 경찰문서) 반인륜적 양민 학살 남침한 북한 공산군이 6월28일 서울을 점령하자 위기의식을 느낀 정부는 수도를 대전을 거쳐 대구로 그리고 8월 18일에는 부산으로 퇴각하는 와중에 육군본부 정보국 제4과(CIC) 김창룡(당시 대령)과장의 지시에 의하여 경찰이 분류한 C,D급 예비검속자를 처형하기 시작하였는데 모슬포 경찰서 관내 347명중 60명은 1950년7월16일 군에 인계되어 집단 학살되었으며(장소미상)(근거: 경찰문서) 동년 8월 20일(음력 7월 7일) 새벽 2시에 63명(한림 어업창고 및 각지서 구금자 중) 새벽 5시경 132명(모슬포 절간고구마창고 구금자 중)을 계염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모슬포 주둔 해병 제3대대(대대장 김윤근 소령) 장병에 의해 송악산 섯알오름, 파괴된 일본군 탄약고에서 집단 학살 함. (근거: 경찰문서) 한편, 제주경찰서 관내와 서귀포경찰서 관내에 구금된 선양들은 처형된 일시와 장소도 정확히 모른체 불귀의 원혼이 되었다. 천인공노할 시체의 암매장 계엄당국은 반인륜적 학살행위를 은폐하기 위하여 유족의 시체인도를 무자비하게 거부하여 비명과 절규의 외마디가 가시지 않은 선혈이 낭자한 시체위에 미리 준비된 돌덩이로 짓눌러 암매장하고 그 일대를 민간인 출입 통제구역으로 설정 무장군인에 의하여 경비를 강화 하였음. 시신수습과 백조일손 지지 안장 유족들의 시신 인도를 완강히 거부하던 군 당국은 부대확장 공사도중 유해가 표출되자 유족들이 요청에 의하여 시신수습이 허용되자 유족들은 1956년 5월18일(음력4월9일) 6년 가까이 흙탕물속에 묻혀 억눌리고 뒤엉킨 시신의 인양을 위하여 좌용진 씨가 제공한 양수기로 물을 뽑아내고 유골을 발굴 하였으나 자타의 구분은커녕 작은 뼈는 거이 흔적이 없었으므로 132개의 칠성판위에 머리하나에 등뼈, 팔, 다리뼈들을 적당히 맞추어 132구로 구성하고 유족의 지성으로 마련한 현 묘역(428평)에 안장하여 백조일손지지( 百 祖 一 孫 之 地) 라 명명하였음. 묘지건립과 탄원서 제출 유족들의 정성을 모아 1959년5월8일(음 4.1)백조일손 묘역에 묘비를 건립 하였으며 1960년 4.19 학생의거 직후 허정 과도정부의 제35회 임시국회에서 양민학살 「 진상조사에 관한 결의(안) 」 이 가결된후 민,참의원 의장에게 탄원서를 제출 하였으며 장면 민주정부 하에서 양민학살 진상조사가 진행 되던차 1961년 5.16군사혁명의 발발로 진상조사가 중단 됨 으로써 유족들은 기나긴 세월 연좌제의 사슬에 묶여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군사정권에 의한 묘비의 파괴와 강제이장 5.16군사정권은 군경이 자행한 반인륜적 만행의 흔적을 없애도록 경찰에 지시 하였으며 이에 따라 1961년6월15일 서귀포 경찰서장의 지휘로 모슬포지서 급사로 하여금 묘비를 파괴하는 한편 집단 조성된 백조일손묘역을 해체하도록 유족들을 강압 함 으로써 선량한 유족들은 제2의 잔인한 피해를 의식하여 23위는 야밤을 이용하여 타지로 이장하였음. 그러나 전 유족의 안위와 자손만대의 화합을 추구하며 2002년4월5일 41년 만에 7위를 본 묘역으로 재 이장함. 위령비 건립과 민관합동위령제 봉행 "맺힌 한은 풀어야 한다."는 문민정부의 해원의 뜻에 따라 제주도 4·3사건 민간인 희생자 유족회에서는 파괴된 묘비의 개각수립을 비롯한 위령사업의 필요성을 공론화 하였으며 이에 제주도와 제주도의회는 모험적 의지로 이념적 갈등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