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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등 많은 동지들과 경도의 미도 신사 경내에서 밀회하여 항일투쟁과 독립운동 방법을 정하고 1942년 8월 징병제도를 이용하여 공군과 경찰에 들어가서 일본 중요 기관을 폭파하고 반전과 내란 공작의 작전 계획을 세웠으며 동년 10월 대판 철도국에 다니면서 항일단체인 철윤회에 참여하여 동지를 규합하고 일본은 2차 세게대전에서 반드시 패전한다는 반전 의식을 고취하였던 바 이를 탐지한 왜경은 체포령을 내렸다. 고야광남이란 이름으로 신내천현(카나가와현) 지방으로 숨어다니다가 국내 실정을 살피기 위해 일시 귀국하여 동지들에게 일본의 동향과 항일투쟁 상황을 알리고 익년 3월 다시 도일하여 국내 현황을 전하였는데 이때 한국에서는 전시 식민지 정책으로 징병 징용 정신대 등 우리 민족은 인명과 재산을 수탈 당하여 굼주림의 참혹한 수난과 실상을 듣고 동지들은 항일투쟁에 헌신할 의지가 더욱 굳어젔다. 1943년 10월 시국 강연 차 대판 공회당에 오는 일본의 국무총리 동조영기(도조 히데키)를 암살할 게획을 세우고 동지들과 은밀히 폭탄을 입수하였던 바 왜관헌에게 발각되어 재기를 꾀하여 변신하였으나 익년 5월 14일 경도에 있는 친형 택에서 피검되어 1년여에 걸친 미결수로 동지들과 함께 옥고를 치루다가 해방 한 달 후인 1945년 9월 20일 다시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선고로 출옥하였다. 광복 후 온갖 풍상을 겪으시면서 자제 교육과 통일 염원에 힘쓰다가 1990년 7월 24일 대구시 수성구 만촌1동에서 향년 67세로 영면하시니 광복회 동지장으로 이 곳 대구 선열묘지에 모셨으며 정부에서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서훈하고 이 비를 세웠다. 부인 진양 강현선 여사는 부덕이 있고 슬하에 5남을 두었는데 희종 희영 희웅 희현 희범이며 자부는 전태득 천도수 진은숙 박순애이다. 손자에 성철 윤준 성훈이 있고 손녀에 미란 혜은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