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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독립은 온 국민의 염원이었으니 그 열기는 남원 지역에도 뜨겁게 달아올라 둔남면 3.1운동에 불을 지폈다. 3월 10일 1차 만세운동에 이어, 3월 23일 장날을 이용하여 2차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날 오후 2시 장터에서 천도교도와 기독교도가 중심이 된 시위군중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 행진하였다. 일본 경찰은 원동산 공원에서 연설 주동자를 체포하여 주재소로 연행하였다. 격분한 8백여 명 시위군중은 면사무소로 돌진하였다. 이어 면장 면서기들을 독려하여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로 달려가 구금된 사람들을 석방시켰다. 그러나 남원헌병분견대와 임실경찰서에서 출동한 무장 병력의 발포로 만세 시위대는 일단 해산하였다. 그후 일제의 검속으로 만세운동을 주도한 40여 명의 동지들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1919년 12월 광주지방법원 전주지법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지역형을 선고 받았다. 그 중 둔덕 이씨가 16명이었으며, 여기에 투철한 독립정신으로 최고령의 애국지사가 게셨으니 바로 이태우(李太宇) 선생이다. 본명은 이정우(鼎宇) 선생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춘성정(春城正) 담손(聃孫)의 후손으로 효령대군의 15대손이다. 아호는 만회(晩悔), 동농(東農)이며, 자는 윤필(允弼)이다. 선생은 주경야독으로 높은 학문을 쌓은 유학자로서 1902년 교관 벼슬을 제수 받을 만큼 인품이 높았다. 경술국치로 나라 잃은 울분과 독립의지를 다질 즈음 이기송 지사가 만세운동 동지를 규합하자 53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거사에 동참하였다. 이는 대의를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고매한 선비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선생은 옥중에서 회유하는 일인 교회사에게 '죽고 싶어도 죽을 내 나라가 없어 죽지 못하노라'고 항거하며 선비의 기개를 토로하기도 하였다. 선생의 항일 정신은 유고시집인 「동농한시집」 24수에도 고스란히 담겨있다. 선생께서 3.1만세 후 구금될 때와 투옥될 때, 그리고 옥중에서 출감 후 환가할 때 독립을 갈망하는 우국충정의 마음을 육필로 남기었다. 그 정신은 전주 형무소에 입감할 때의 쓴 시에도 잘 나타나 있다. 입옥시(入獄時) 수발진강제(鬚髮盡强制) / 간오시불시오(看吾是不是吾) / 갈상신차일(曷喪辛此日) / 서사멸흉노(誓死滅凶奴) 수염과 상투머리 왜놈에게 깎이니 / 내가 나를 보아도 내가 아니로구나 / 왜적이 언제나 망할까 깊은 시름 자아내는 오늘 / 죽음으로 맹세하노라 기필코 왜적을 섬명할 것을 이후 선생은 출옥 후에도 상복을 입을 만큼 나라 잃은 국민들은 물론 거사동지들과 그 가족들의 안위를 걱정하다가 옥고의 후유증으로 출감 1년여 만에 보절면 황벌리에서 서거 하였다. 선생이 참여한 3.1운동은 후일 남원 3.1운동만세운동에 영향을 주었으며 1995년 정부는 선생에게 독립유공자 대통령을 추서하였다.
이남일 근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