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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헌 박상진 의사 조선 말기인 1884년 12월 7일 울산군 농소면 송정리(현 울산시 북구 송정동)에서 승지 박시규와 여강 이씨의 장남으로 태어난 지 100여 일 만에 백부의 양자가 되고, 4살이 되던 해에 경주 외동면 녹동으로 아사하여 성장했으며, 1898년 그의 나이 15세에 경주 최부자집의 월성최씨 영화(鉉敎의 장녀)와 혼인했다. 14세 당시 학덕이 높은 왕산 허위(애국계목 사상가, 의병장)의 문하에 입문하였다. 1902년 상경하여 정치와 병학을 배우며, 명사, 문객들과 교제하며 국제정세를 습득하였다. 1906년 양정의숙에 입학하여 신문학을 공부하였고,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과 의형제를 맺었다. 1908년 산돌석이 일제의 교활한 농간에 빠져 순국하고, 스승 허위는 고종황제의 밀명을 받고 의병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사형을 당하였다. 이를 지켜본 박상진은 스승의 시신을 수습한 후, 홍성에서 상경한 김좌진을 만나 서로 의기투합하여 의형제를 맺는다. 이는 뒷날 김좌진이 광복회 부사령으로 활동하는 계기가 된다. 1909년 '양정의숙 법률경제과'를 졸업한 박상진은 비밀결사 조직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했고, 1910년 판사 등용 시험에 합격해 평양 지원에 발령까지 받았으나 일제에 국권이 침탈당하자 이에 회의감을 느껴 결국 부임을 거부하였다. 안동현과 신의주에 여관을 설치하여 항일운동을 시작하였고, 1912년에는 대구에 상덕태상회를 건설하여 재원조달과 연락 거점으로 이용하면서 만주이민사업을 추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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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부터 조선 국권회에서 대한광복회를 결성하여 총사령에 추대되었으며, 그 영향으로 함께 활동하던 김좌진과 홍범도는 청산리대첩, 봉도동전투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박상진은 대한광복회 부사령(초대 이진룡, 2대 김좌진)으로 하여금 만주를 전담케하고, 8도 지부장을 임명하는 한편, 별도의 상업조직을 각지에 결성하였다. 이후 이제의 세금강탈과 금광습격, 친일부호와 조선총독의 암살, 신흥무관하교의 지원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다가 1918년 2월 1일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4년 여의 옥고끝에 1921년 8월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현재 경주시 내남면 노곡리에 박상진의사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으며, 정부에서는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