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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러시아인 사바찐이 바라본 을미사변 37 오랫동안 한국은 ‘을미사변(乙未事 變)’의 진상규명 뿐만 아니라 명성황 후의 직접적인 시해자까지 규명하려 고 노력하였다. 러시아와 일본은 사 건이 발생한지 여러 해가 지나도록  다양한 사료에 기초해서 암살의 배후  논쟁을 진행하였다. 일본은 그토록  외쳤던 한국 독립 주장이 명성황후  암살로 추악하게 드러나자 그 진실을  끝까지 감추고 싶었다. 러시아는 명 성황후 시해사건을 계기로 일본 제국 주의의 추악함을 드러냄으로써 극동 지역에서 자국의 도덕적 우월성을 강 조하려고 노력하였다. 을미사변 당일 사바찐의 근무 그동안 을미사변은 1895년 10월 8일 새벽 주한 일본공사 미우라 고 로[三浦梧樓]가 지휘하는 폭도들이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시 해한 사건으로 알려졌다. 청일전쟁 직전 일본군대는 1894년 7월 23일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 령했다. 일본군대의 ‘경복궁침입사건’ 이후 고종(高宗)은 일본의 감시를 받으면서 자신의 신변 불안에 시달렸다. 최고 권력자 고종은 정신적으 로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그 상처는 고종의 심야 집무와 연결되었다. 일본인들의 활동을 궁궐에서 감시하기 위해, 고종은 외국인을 경복궁 에 상주시켰다. 다름 아닌 장군 다이(W.M. Dye), 대령 닌스테드(F.J.H. Nienstead), 건축사 사바찐(А. И. Середин-Сабатин, 1860 ~1921) 등 이었다. 경복궁에는 항상 두 명의 외국인이 체류하였다. 사바찐은 1894년 9 월부터 경복궁에 1주일에 4일씩 저녁에 출근하여 아침에 퇴근했다. 을 미사변 당일 시계를 소지한 사바찐은 현장에서 매 시간마다 사건의 추 이를 확인했고, 새벽 5시가 넘어서는 15분 단위로 상황을 파악했다. 따 라서 사바찐은 을미사변 관련 증언뿐만 아니라 보고서까지 작성할 수 있었다. 1895년 10월 8일 주한 러시아공사 베베르(К.И. Вебер)에게 사건에 대해 증언했다. 또한 즈프 주재 러시아부영사 찜첸꼬(А.Н. Тим ченко-Островерхов)의 권유로 10월 30일 을미사변의 보고서를 작 성했고, 북경(北京) 주재 공사에게 자신의 보고서를 제출해줄 것을 요청 했다. 당시 사바찐은 서울 주재 독일영사를 비롯하여 일부 외국인들이 보 고서를 작성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사바찐은 건청 궁의 상황을 상세하게 증언했으나, 명성황후의 암살과정을 목격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사바찐의 진실과 거짓 사이 그런데 사바찐의 증언과 보고서에서 중요한 사실을 은폐한 의혹이 제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