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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1920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전쟁 원년’ 선포의 배경과 의미 37 올해는 광복 80주년이자 을사늑약  체결 12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런 데 최근 뉴스를 통해 들려오는 과거 사 관련 이슈들을 접할 때마다 ‘이 나 라에 진정한 광복이 왔는가’ 자문하 지 않을 수 없다. 여전히 과거 침략주 의 전쟁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 없는  일본 정부와 일부 우익인사들, ‘친일 반민족행위자’들을 미화하는 일부 정 치인들, 한 술 더 떠 독립운동가들의  노력과 희생을 폄훼하는 이들을 보면  과연 정상적인 역사교육을 받은 사람 들이 맞나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광 복 8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의 독립 과 자유를 되찾기 위해 헌신한 독립 운동가들의 노력을 되짚어보고 그 의 미를 성찰하는 것은 그래서 더욱 필 요한 작업일지도 모른다. 이에 1920 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전쟁  원년’ 선포의 배경과 의미를 중심으 로 우리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재조 명해보고자 한다. 1920년 임시정부의 ‘독립전쟁 원년’ 선포 1919년 거족적인 3 · 1운동의 결과로 국내외 각지에서 임시정부가 수 립됐다. 그중에서도 가장 실체가 분명했던 조직은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국민의회와 상하이(上海)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그리고 서울의 한 성정부였다. 세 정부는 지속적인 통합 논의 끝에 마침내 1919년 9월 상 하이에 근거를 둔 통합 대한민국임시정부로 재출범했다. 통합 임시정부 출범 이전까지 초기 상하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노 선은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함으로써 열강의 승인과 지원을 얻는 ‘외교독립운동’ 노선을 주력으로 하고 있었다. 특히 임시정부는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를 위해 열리는 파리강화회의에 큰 기대를 걸고 적극적으로 외교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열강은 임시정부의 간절한 호소를 외면했다. 파리강화회의에 서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임시정부 안팎에서는 기존의 외교독 립운동 노선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일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외세에 의 존하지 말고 우리 스스로 전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독립전 쟁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1919년 11월 누구보다 강경한 독립전 쟁론자였던 이동휘(李東輝)가 국무총리로 부임하면서 대외정책의 기조 는 외교독립운동에서 독립전쟁 노선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마침 국제정세도 독립전쟁론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미국과 일본 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된 것이다. 파리강화회의의 결과 일본은 중국 산 둥(山東)반도의 이권과 태평양 적도(赤道) 이북의 섬들을 획득했는데, 일본의 중국 및 태평양 진출을 경계한 미국이 이를 견제하면서 미·일 간의 전쟁위기설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러시아 연해주와 시베리아 지 역의 정세 역시 심상찮았다. 당시 일본은 1917년 러시아혁명의 와중에 내전으로 혼란에 휩싸인 러시아에 자국민의 권리와 생명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무장 군대를 파견했는데, 본심은 원동 지역의 장악에 있었다. 일본은 반(反)혁명군인 백위군(白衛軍)을 지원하며 소비에트 군대와 전 투를 이어갔다. 이처럼 미일전쟁설에 이어 러일전쟁설까지 퍼지자 임 시정부 입장에서는 고무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임시정부의 독립전쟁론자들은 지금이야말로 독립전쟁을 벌일 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