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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영원한 주석 ’김구 37 을 조직했다. 1937년 중일전쟁을 도발한 일본군이 남경을 침공 하자 11월 김구는 임시정부를 진강에서 다시 호남성 장사(長沙)로 옮겼다. 1938년 5월 조선혁명당 당사 인 남목청(楠木廳)에서 한국국민당·재건 한국독립당 등 3당이 통일회의를 진행하였다. 이때 일제의 사주 를 받은 흉한 이운환의 총격을 받았다. 조선혁명당 대표 현익철은 절명하고, 김구는 중상을 당해 생명 이 위태로웠으나, 천우신조로 목숨을 보전할 수 있 었다. 일제가 장사를 침공하자 김구는 다시 임시정부를 이끌고 1938년 광주를 거쳐 유주와 기강(綦江)으로 옮겨 갔다가 1940년 9월 중국의 임시수도 중경(重 慶)에 안착하였다. 1932년부터 8년여 간 임시정부의 깃발을 들고 정부 요인과 그 가족들을 건사하며 온 갖 위기를 극복한 끝에 대장정을 마감한 것이다. 중경시기 임시정부의 주석으로 광복을 맞이하다 김구는 1940년 4월 기강에서 한국독립당(중경 한 국독립당)을 결성하였다. 한국국민당을 중심으로 재 건 한국독립당과 조선혁명당을 통합하여 임시정부 의 여당으로 창당한 것이다. 나아가 9월 17일 임시 정부의 국군으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이제 임 시정부는 당(한국독립당)·정(임시정부)·군(한국광복 군) 체제를 갖춘 것이다. 1940년 10월 8일 김구는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 침 하는 헌법 개정을 단행하였다. 그 핵심은 집단지 도체제인 국무위원회제를 단일지도체제인 주석제로 전환한 것이다. 종래 국무위원회에서 선출한 국무위 원이 교대로 맡았던 주석을 임시의정원에서 선출하 고, 주석은 임시정부를 대표하며 국군의 통수권을 행사하도록 하였다. 바로 이러한 주석 자리에 김구 가 선출되었다. 이로써 김구는 한국독립당의 중앙집 행위원장, 정부의 주석, 광복군의 통수권자로 부상 임시정부의 이동 도중에 한국국민당을 창당한 뒤 기념촬영한 김구와 요인들(1935.11.7)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전 례식 후 총사령 지청천(왼쪽 두 번째), 중국군  대표 등과 기념촬영한 김구(지청천 우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