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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임시정부 외교 선봉장 조소앙의 1940년대 전시외교 활동 37 1940년대 전반기 조소앙은 임시정 부의 외무부장으로 외교 방략을 설 정하는 등 외교정책을 주도하였다.  1941년 8월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 와 영국 수상 처칠이 합의한 「대서 양헌장 · 을 발표하자, 이를 환영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임시정부가 반 파시즘 연합국의 일원임을 선언했 다. 1943년 11~12월 카이로선언  전후 시기에는 한국 신탁통치안 반 대투쟁을 전개했다. 또한 미국에서  열리는 샌프란시스코 회의(1945.  4. 25~6. 26)에 참가하여 한국 독립 과 신탁통치 문제를 협의하고자 했 으나, 한국 대표단의 대회 참석은  무산되고 말았다. 조소앙은 1945년  6월까지도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려 는 목표를 포기하지 않고 필사적으 로 노력했지만, 미국정부의 임시정 부 불승인 정책은 한국민의 절박한  호소를 끝내 외면하고 말았다. 미국 의 임시정부 불승인정책은 해방정 국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고, 한국현 대사에 큰 아쉬움을 남겼다. 임시정부의 외무부장으로 외교 방략을 설정하다 1932년 4월 윤봉길의 투탄 의거가 있은 뒤, 대한민국임시 정부(이하 임시정부로 줄임)는 그동안 독립운동의 근거지였 던 상하이(上海)를 떠나야만 했 다. 이후 8년여에 걸쳐 정부 소 재지를 7차례나 옮겨 다니는 고 단한 장정을 계속했고, 1940 년 9월 충칭(重慶)에 정착하였 다. 조소앙(趙素昻, 본명 趙鏞殷, 1887~1958)은 충칭시기를 개 막한 임시정부 국무위원(주석 : 김구) 중 한 사람이었다. 조소앙은 1939년 10월 임시정부의 외무장(外務長)으로 선임된 데에 이어, 1940년 10월 10일 「 대한민국 임시약헌」 (1940년 10월 개정)에 의 거해 구성된 국무위원회에서도 외무부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8 · 15해 방 후 환국할 때까지 임시정부의 외교 수장으로서 전시외교의 선봉에 서 있었다. 임시의정원에서 제정한 대한민국 임시약헌 개정초안(1927년)과 조소앙 주도 제정 대한 민국 건국강령(1941년, 국회도서관 제공) 노년의 조소앙(연합뉴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