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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공은 유시부터 비범하시더니 ○장에 이조사말에 왜구의 침략성이 을사조약과 결술합병으로 수로골화 되여 그 야만성이 삼천리 금수강산에 충일하야 동포의 생령이 도탄지중에 합입됨을 개탄하던 이래 기미3.1운동을 계기삼아 조국광복을 결심하고 향리에서 육창주 허상기 동지들과 모의 하던중 1919년 고종황제의 국장에 다녀온 후로 동지들과 같이 모의하여 동년 3월 29일 옥천군 이원시일에 거사할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동지들과 같이 광목으로 태극기 수백매를 제작 배포하고 미리 선동하여 당일 이원시장에 운집한 수백여 군중과 한국독립만세를 제창하며 일대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제지하는 당시 이원 왜헌병주재소 ○본리 작분대장과 동 보조원등을 구타하고 주재소를 습격파괴하였다. 동일 시장에 나와서도 이제 참가하지 않음에 격분하여 동가문인 허훈 허유 와 합세하여 육사원을 구타 전치2주이상의 상해을 가하였다. 상기등의 사건으로 징역1년을 언도받고 공주형무소에서 복역후 출옥하였다. 출옥후에도 굴치않코 투쟁을 계속할 목적으로 동지를 규합하였으나 대개 복역이며 또 왜제에 탄압이 심하여 지하운동으로 청장년들에 애국사상을고취하였다. 공의 위대한 독립정신은 온 민족이 한결같이 추모하며 후손에 귀감이 되여 영원히 빛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