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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매 미구에 국내에서도 일대 봉기가 있을것을 예견하고 동지 진학철과 더부러 인접 사인면의 유지 이기영등과 내통하며 항상 국권회복운동에 나설 기회를 엿보던중 1919년 3월 민족대표들에 의한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선언이 있자 이에 호응하는 만세시위를 전개코저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제작한 후 동월 11일 사리원 장꾼들을 격동하니 군중의 수 근 300인이 행렬을 짓고 도심을 향하는데 때마침 출동한 일헌들의 제지를 당하자 공을 위시한 군중은 더욱 맹위로써 그와 맛섰다. 오후 늦게 형세가 전도되어 대로와 골목길에 검문이 시작되자 공은 피할길 없어 피집되어 평양공소원에서 1년 6월 실형 언도를 받으시니 즉시 불복항소하시기를 한인이 한국을 되찾으려함은 만국의 평화정신이 인정하는 바인데 어찌하여 일본은 이를 죄로 다스리려 하는가 그래도 형벌을 주장하거든 어디 만국을 책하여보라 하시었다. 동년 5월 29일 항소가 기각되고 익년 9월에 출옥한뒤로는 매양 일경의 미행을 당하시면서도 교단을 고수하시더니 1936년에는 본군 장항으로 이주하시어 오로지 향민의 교화 개명에 힘쓰시었다. 1945년 8.15민족해방을 보시고는 이로써 생애의 영화를 향유한 것이라면서 조용히 주민들과 고락을 함께 하시다가 1974년 4월 10일 서거하시니 서천군 장흥읍 성주동 산494의 2번지에 손자되시다. 정부에서는 공의 생시 공로를 기리고저 1977년 12월 13일 건국공로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으니 이에 그 사적을 새겨 이 비를 삼가 세우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