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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하나 공부보다는 나라를 되찾는 일이 선결 과제임을 결론 짓고 독립운동을 할 것을 스스로 굳게 다짐하고 그해 하휴를 이용 7월에 명고옥에 갔다. 그 곳에서 진주 출신 유학생 이수영을 만나 뜻을 같이 할 것을 맹세하고 동지를 규합하여 민족 복흥회를 결성하고 회장에 이수영 부회장에 공이 피선되었으며 민족사상을 고취시키고 일본의 중요 공장 파괴 및 요인 암살 등으로 일본 사회를 혼란시켜 독립을 쟁취하는데 목적을 두었으며 왜경에 발견되었을 때에는 자결을 원칙으로 하며 뜻을 이루지 못할 경우에는 묵비로 사수할 것을 행동강령으로 의결하였다. 공은 부회장 겸 경도총책을 맡아 경도 조선 유학생들을 극비리에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뜻을 같이 할 것을 호소한 결과 박훈조 외 36명의 동지를 얻었다. 1939년 8월 회장 이수영 하숙집에서 극비리에 폭탄 제작에 착수하는 한편 민족 복흥회를 평화회라 개칭하고 외적으로는 조선인의 문맹퇴치와 개몽운동으로 독립운동을 가장하하였다. 1940년 4월 명고옥에 있는 거대한 공장을 폭파할 계획을 추진 중 5월에 築口曾根田 타이루 공장에서 동지가 운동 중 비밀이 누설되어 회장을 비롯하여 20여 명이 체포되었고 공도 경도학교에서 검거되어 명고옥 검찰로 이송되었다. 이송 도중 자결할 기회를 틈탔으나 왜경 2명이 특별감시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호송 열차에서 눈을 감고 회상하니 목적한 조국독립은 보지 못한 채 20세의 청춘이 초로 같이 사라지다니 이 나라 이 민족을 어찌하고 눈을 감을고 원통하고 한스럽도다. 3개월의 모진 고문 끝에 반신불수의 몸이 되어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의 형을 받았다. 독립된 조국 정부에서 독립유공이 인정되어 1986년 12월 대통령 표창과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훈했다. 2000년 2월 대구 파티마 병원에서 향년 80에 고요히 영면하였다. 피끓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