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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성교회 연혁 및 순교사
대한예수교 장로회(합동) 법성교회는 1900년대 초부터 복음이 전해져 가정교회로 시작된 것으로 구전된다. 1915년에 이르러서 성재동에 에배처소를 마련하여 성재동교회가 설립되었고 미국인 이아각, 남대리 선교사가 매 주말에 와서 강론하였다. 1917년에는 당국의 허가를 받아 대성학원(교장 이아각)을 설립하여 신교육과 목회활동을 겸하였다. 이듬해 1918년에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로부터 후원을 받아 20여평의 ㄱ자형 예배당을 신축하여 예배드렸다. 1920년대에는 조선시대 옛 진성 동헌터 아래(조선 야소교 법성포교회 진내리 201번지) 초가 예배당에서 야학과 예배가 겸해졌다. 초기 법성교회는 복음전파와 교육을 통해 지역 선교와 문맹타파에 앞장섰으며 그러다가 해방과 한국전쟁을 맞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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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장기탁 장로의 증언에 의하면 1950년 한국전쟁으로 법성포가 인민군의 수중에 떨어지기 열흘 전인 9월 첫 주부터 교회 에배당 종소리가 연 4일간 동네 전체에 주야로 울렸다고 한다. 이 일이 있은 후 인민군이 내려온다며 사람들은 피난을 떠났다. 실제로 9월 13일 인민군이 총을 쏘며 쳐들어 왔고 참화가 이어졌다. 기독교인 명단을 찾아낸 인민군은 면사무소 창고에 당시 시무하던 김종인 목사를 가두었다가 대사고개로 끌고 가 양잿물을 삼키도록 했다가 삼키지 않고 입에 머물고 있자 칼로 목을 쳐 죽임을 당해 순교하였다. 이 소식에 큰 딸 김순화는 공산당 물러가라고 외치며 다니다 인근 신덕동 저수지로 끌려가 대창에 온 몸이 찔려 죽임을 당했다. 장기탁 장로도 집으로 들이닥친 인민군 손에 죽음 직전 간신히 탈출했으나 부인 송옥수 집사는 딸과 함께 인민군에게 잡혔고, 박옥남 집사, 김진복 청년 등과 함께 전깃줄에 손이 묶인 채 끌려가 언목 산 밑 해수 둠벙 앞에서 대창에 찔린 후 둠벙에 버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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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전국 순회 복음 전도인이었던 이광년 전도인과 무명의 성도들도 함께 순교하였다. 이에 대한 예수교 장로회 99회 합동 총회에서는 김종인 목사 외 6인을 총회 순교자로 등재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1953년 현 교회당 뒤 포구 쪽에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고급 요정 해울루를 예배당으로 매입하였고, 이어 1977년에는 법성리 694-1번지 위치에 2층 예배당을 신축했으며, 2001년에 현 예배당 부지를 매입하여 그해 8월 기공하여 2002년 4월 7일 입당예배를 드리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법성교회는 순교자들의 신앙을 본받고 다음 세대에 계승하여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영혼 구원하여 제자 삼는 사도행전적 교회로 든든히 서 갈 것이다.
주후 2017년 12월 법성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