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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포 정문부 선생 사적비 세상에 적은 공으로 상을 받는 이도 있으되 큰 공을 세우고도 댓가를 받지 못할 뿐 아니라 도리어 박해로 슬픈 최후를 마친 이가 계시니 문무 겸전한 농포 정문부 선생이 바로 그 이시다. 공은 일찍 명종 20년 2월 19일에 나시어 27세에 함경북도 병마평사에 임명되어 나가 이듬해 28세때에 임진란을 만났던 것이다. 그때 내란을 일으킨 반역자들을 소탕하는 한편 북으로 쳐들어간 억센 왜적들과도 싸워야 했고 또 틈을 타 침구하는 오랑캐들까지 무찔렀었다. 황막한 변방에 깃발을 꼿고 바람같이 달리면서 같은 때에 한 칼을 들고 삼중전투를 감행하여 모두 대승첩을 거두었으니 어찌 그리 장하던고 임진란이 끝나고 광해군 시대에는 숨어 살다가 인조때 원수의 지위에 추천되기까지 하였으나 어머님을 봉양하기 위해 전주부윤으로 나갔더니 일찍 역사를 읊는 시 한 장으로 모함을 입어 옥에 갇히어 모진 고문 아래서 숨을 거두시니 인조 2년 11월19일이었고 향년은 60세, 원통한 공의 죽음을 무슨 말로 위로할 것이랴. 몸은 그같이 가셨지만은 공로는 숨길 수 없어 숙종 때 충의의 시호를 내려 보답해 드렸었다. 농포 정공이야 말로 국경 수호의 3대 영웅이라 정부는 후손 세거지인 이곳에 사당을 중건하고 공을 추모하며 공의 행적을 적어 비를 세운다. 1980년 3월 노산 이은상 짓고 고천 배재식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