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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암 선생은 과거시험 문과에 급제했던 고급 관리였다.
정두흠(鄭斗欽:1832~1910)선생은 장흥군 유치면 운월리 출신으로 1910년 경술년 한일합방 때 순절(殉節)한 애국지사이다. 운암(雲巖) 정두흠은 <손명사(損命詞>을 남기고 순절하였다. ‘손명사’는 “목숨을 버리며 알린다.”는 뜻이다. 순절 당시 유묵은 확인 되지 않고, 공의 문집인 『운암집(雲巖集)』에 <손명사(損命詞> 2수가 전한다. 운암 정두흠선생 자(字)는 응칠(應七)이요, 호는 운암(雲巖)이며 진주인(晉州人)이다.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종2품직) 정철주(鄭哲周)이며, 어머니는 영광김씨(靈光金氏)로 김희(金희:王+義)의 딸이다. 어려서 부터 재기(才氣)가 총명하여 젊은 날에 능주 개천사에서 공부하면서 16세에 남주독보(南州獨步)로 칭송받았다. 그래서 장흥부사 김기석(金箕晳:재임기간 1848. 2~1849. 6)의 권유(勸誘)로 승지(承旨) 최상관(崔相琯)에게 사사(師事)했으며, 32세 때 향해(鄕解), 동당(東堂), 회시(會試)를 거친 후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1792~1868) 선생에게 수업하면서 학문을 닦았다. 1879년(고종16) 48세 나이에 식년문과에 을과 7위로 급제하고 진중(陣中), 정시(庭試), 전시(殿試)하여 주서에 임명되었고, 곧 승문원 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1880년에 성균관 전적(典籍)을 거쳐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었다. 1881년(辛巳), 1882년(壬午)에 차례로 부모상을 당하여 시묘(侍墓) 6년하고 1887년(丁亥) 56세 때 다시 성균관 전적(典籍), 사헌부 지평(持平)되어 임금에게 선정을 베풀 것을 청하고, 그해 10월에 뇌진지변(雷震之變)을 당하여 백성이 크게 동요함에 죄와 상을 분명히 하여 국가의 기강을 세울 것을 상소하여 백성을 위무(慰撫)하도록 진청(秦請)하였다. 1888년(戊子) 정월 종묘대제(宗廟大祭)에 공(公)이 대축(大祝)겸 전사관(典祀官)으로 차출되어 업무를 맡았던바 임금께서 친임(親臨)하시어 보시고 관복(官服)한 벌과 녹미(祿米) 3석, 해조물 등을 특별히 하사(下賜)하였다. 출처 : 장흥투데이